“살균 처리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행복의 시학을 평생 추구한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는 고독한 몽상의 철학자, 상상력의 낭만주의자답게 화가와 그림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종종 ‘꿈꾸기’의 황홀경에 빠져든다. 그는 마르크 샤갈(1887~1985)을 유달리 좋아했던 듯, ‘꿈꿀 권리’에서 비교적 긴 두 편의 샤갈론을 펼치고 있다.
바슐라르는 ‘샤갈의 성서 서설‘이란 글에서 원초적 몽상의 세계로 초대하여 낙원적 기쁨을 맛보게 하는 샤갈 그림의 역동적 창조성에 대해 이렇게 열광한다.
“샤갈은 세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특히 세계를 드러내 보여줄 줄 알기 때문이다. 낙원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의 세계이다. 하나의 새로운 색깔을 발명하는 것이 화가에게 있어서는 낙원의 기쁨인 것이다.(중략) 모든 것은 함께 사는 것이다. 물고기들이 공중에서 헤엄치고, 날개 달린 당나귀가 새의 길동무가 되며, 우주의 청색이 모든 피조물들을 가볍게 만든다.”
사랑과 희망의 색깔로 인생을 색칠하는 러시아 비데브스크 출신의 화가 샤갈. 젊은 날 우체국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학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마침내 솔본느대의 교수에 이르는 끝없는 존재의 변증법적 승화를 보여준 프랑스 샹파뉴 시골 태생의 몽상가 바슐라르.
이 두 영혼이 서로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삶의 어둠을 빛으로 변용시킬 줄 아는 행복의 연금술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 ‘성서’는 제2의 자연”이라고 강조하면서, 성서로부터 예술적 영감의 샘물을 떠올려 일종의 현대적 성화(聖畵) 시리즈를 완성한 샤갈의 화집을 보고 바슐라르가 꿈꾸며 다시 낙원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은 그 자체로서 드문 예술적 교감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특히 ‘에덴 동산’이란 작품이 담고 있는 양성구유(兩性具有)의 꿈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는 대목은 정말 감동적이다.
이렇듯 바슐라르는 샤갈의 ‘성서’ 그림을 촉매로 해서 자신의 시적 몽상을 깊이 펼쳐나간다. 한낱 이미지의 씨앗으로 던져져 있던 한 폭의 그림으로부터 독자적인 또 하나의 생성적 이미지를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꿈꾸기’를 통해서 ‘존재의 무거움’을 한결 가볍게 하는 길을 여는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