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생인 이브 본느푸아(Yves Bonnefoy)가 80세 생일을 맞은 2003년 6월에 '마가진 리테레르'에서 본느푸아 특집을 꾸몄을 때, 그리고 2004년 4월 '르 몽드'의 문예란에서 본느푸아를 대대적으로 조명하는 기획특집을 했을 때, 하나같이 '현존의 시인'이라는 명칭으로 시인을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느푸아가 자신의 문학적 생애의 시작에서부터 85세가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현존(presence)'의 문제에 매달려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할 것이다. 우리가 단 한마디로 본느푸아를 규정하고자 할 때 '현존의 시인'이라는 명칭보다 더 정확한 명칭은 없을 것이다. 1953년 폴 발레리의 '젊은 파르크'를 능가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첫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을 출간한 이래, '사막을 지배하는 어제'(1958), '비석'(1965), '문지방의 현혹 속에서'(1975), '빛없이 있었던 것'(1987), '눈의 처음과 끝'(1991), '구부러진 판자'(2001) 등의 시집을 내놓은 본느푸아는 이제 "20세기 프랑스 문학사의 가장 중요한 형상 중의 하나"(로베르 코프)가 되었다. 최근
"나는 작은 골짜기가 많기 때문에 발라쥬라 불리는 샹파뉴 지방의 한 모퉁이, 강과 시냇물의 나라에서 태어났다. 내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장소는 골짜기의 움푹 파인 곳이나 맑게 흐르는 물가, 수양버들의 짧은 그늘 속에 있었다. 그리고 강 위에 안개가 피어 10월이 될 때…" 금세기 최고의 시인 철학자로 평가되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대표작 '물과 꿈'에 나오는 이 같은 물의 몽상은 강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조차도 물에 대한 근원적인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단지 바슐라르 특유의 아름다운 산문이 갖는 시적 문체의 흡인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균 처리된 세계'라 부른 과학인식론의 메마른 탐구로부터 풍부한 문학 상상력의 형이상학 쪽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평생 행복한 몽상에 젖어 살 수 있었던 특이한 사상가 바슐라르. 그는 프랑스 샹파뉴 지방 출신이면서도 유달리 물의 풍경에 민감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감각적 실체로 파악된 물에 대한 몽상을 회화의 세계에서 가장 절묘하게 묘사한 화가를 꼽는다면, 우리는 서슴없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940~1926)를 들어야
19세기 플로베르풍의 사실주의 또는 발자크풍의 전통적 소설형식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새로운 ‘탐색으로서의 소설’을 쓰고자 한 20세기 ‘누보 로망’의 작가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소설가로 미셸 뷔토르(Michel Butor, 1926~)를 들 수 있다. 그는 사르트르가 정확히 지적한 바, ‘소설에 의하여 소설을 부정하고’, ‘소설에 대한 소설’을 시도한 혁명아라 할 수 있다. 특히 2인칭 소설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개척한 ‘라 모디피카시옹’(변모)은 1인칭 소설의 효과와 3인칭 소설의 효과를 독자에게 동시에 느끼게 하는 혁신적 기술방법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뷔토르가 이 소설에서 종래의 소설처럼 레옹 데르몽이라는 주인공을 ‘그’ 또는 ‘나’라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 부른 것은 그의 독특한 소설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소설이란 작가가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독자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읽어가는 독자의 마음속에 점점 형성되어가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이라 부르는 것에 의해서 독자도 작품 속에 끌려가고, 작가와 똑같은 자격으로 창조에 관여해야만 한다. 또한 소설은 현실이 어떤 식으로 우리 눈앞에
누보 로망 이후 가장 전위적인 문학운동을 앞장서 주도해 온 ‘텔켈’ 그룹의 기수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1936~ )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마르슬랭 플레네와 더불어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3인방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61년 전통적인 심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누보 로망적 양식의 실험소설 ‘공원’(메디치상 수상)을 발표함으로써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되며 프랑스 문단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선봉장이 된다. 줄거리라는 ‘시간성’보다는 ‘짜맞추고 뒤섞은’ 이미지의 조합에 의해 공간성을 획득함으로써 하나의 치밀한 그림이 되는 소설 ‘공원’은 현대소설사에 등장한 돌연변이 같은 실험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의 시각적 차원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솔레르스가 정신적 내용을 확실히 포착하여 그것을 형태의 정확한 소묘와 선명한 배치에 의해 조형적으로 전개시킨 17세기의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을 특별히 주목하여, 그에 대한 본격적인 평론과 소설 ‘푸생 읽기’(1961)를 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보다 3세기 전에 태어난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솔레르스는 푸생에게서 시대를 뛰어넘는 어
“그대 눈 너무도 깊어 물을 마시러 몸을 기울이며/나는 보았다, 온갖 태양들이 그리로 와 제 모습 비춰보는 것을/온갖 절망들 그리로 뛰어들어 죽어가는 것을/그대 눈 그리도 깊어 내 거기서 기억을 잃어버리네” 이렇게 시작되는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의 시 ‘엘자의 눈’은 프랑스 현대시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시의 명편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엘자’는 러시아의 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의매(義妹)로서 1928년에 만나 시인의 아내가 된 엘자 트리올레를 가리킨다. 그녀는 무려 32권에 걸친 ‘교차 소설집’(1965~1974)을 함께 쓴 동지적 공동 집필자일뿐만 아니라, 시집 ‘엘자의 눈’(1942)을 비롯해서 ‘엘자’(1959), ‘엘자에 미친 남자’(1956) 등을 태어나게 한 시적 영감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아라공은 그 어느 시인보다 강렬한 울림의 연가를 많이 남긴 시인이었음에도 오랫동안 ‘코뮤니스트 작가’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활동했던 이념적 성향 때문에, 그의 문학에 대한 가치평가 또한 편향적이고 불공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라공이 1958년에 발표한 소설 ‘성주간’(聖週間)은 개인적 상황과 역사적
스테판 말라르메(Stphane Mallarm, 1842~98)는 상징주의의 3대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보들레르에 이어 순수시의 극치, ‘고귀한 시의 이상’을 끈질기게 추구한 수도사로 평가된다. 일생 동안 시를 종교처럼 생각했던 그는 ‘시의 종교’, ‘미의 종교’, ‘이상의 종교’에 도달하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버리고 순교자적인 고행에 삶 전체를 바친다. 그는 한 편의 야심적인 순수시를 쓰기 위해 5년, 10년, 또는 20년의 산고를 겪기도 한다. ‘주사위 던지기’(1897) 같은 작품은 무려 30년간의 번민에 찬 심사숙고 끝에 완성한, 프랑스 시문학 사상 가장 난해한 시적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말라르메는 사물의 순수한 개념과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언어를 일반적 의미에서 해방시키고, 시어의 배합을 일상적인 규칙과 구문에서 해방시켜 고도의 음악성과 특이한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순수시를 쓰고자 했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인정받지도 못했다. 기교에서는 포의 영향, 사상 면에서는 보들레르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는 그의 초기 시편들 중 유난히 낭만주의적 색채가 뚜렷한 ‘바다의 미풍’ 정도가 겨우 일반 독자들에게 읽혀질 뿐이다. 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를 들고 나와, 실존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유포시킴으로써 한때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이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하나의 신화적 상징임이 분명하다. 그는 철학사상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문학비평적 에세이 등 문학 분야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이는 독창적 성취를 이룬 위대한 전방위적 대가로 역사에 이미 자리매김 되었다. 글로 쓰는 거의 모든 예술장르에 걸쳐서 빼어난 업적을 자랑하는 그가 미술 평론 분야에서도 주목한 만한 글을 남겼다 해도 그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론과 마찬가지로 예술론 역시 그가 줄기차게 추구한 특유의 실존적 정신분석 비평의 변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etti, 1901~1965)에 관한 2편의 본격적인 평론 ‘자코메티의 회화’(1945)와 ‘절대의 탐구’(1948)를 쓴 바 있다. 이는 자코메티의 그림과 조각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인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르트르는 상황 속에 있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타인을
“자연에는 폭풍우의 드라마, 인생에는 고통의 드라마가 있다”고 말했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가 1890년 7월 29일 파리 북쪽 34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서 37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한지 어언 11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생전에는 하루에 3프랑 50전을 받는 지붕 아래 방의 집세를 지불하지 못해 쩔쩔매기도 했던 반 고흐의 그림 ‘가셰 박사의 초상’(1890)이 1990년 5월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82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계량화된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고흐의 ‘아를르 시대’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밤의 카페’(1888·사진)는 그의 투명한 시선이 포착한 현실 인식의 깊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적색, 황색, 녹색, 황록색 등의 조합이 불러일으키는 밝은 색채 처리의 효과도 독특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묘사이다.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서 “카페는 인간이 광기에 젖으며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임을 나타내 보이려고 애썼다”고 주석을 붙였다. 그리고
사실주의 문학의 성서로 간주되는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80)의 소설 ‘보바리 부인’(1857)은 출간되자마자 “공중도덕과 종교윤리, 미풍양속을 모독하고 있다”는 죄목으로, 당시의 검찰당국이 법정에 기소까지 했던 작품이다. 오늘날 근대소설의 아버지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선구자가 세인들의 비난을 받고 문단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소송 당한’ 작가였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소설 ‘보바리 부인’은 당시 노르망디의 루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던 한 유부녀의 간통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그 줄거리로만 본다면 지극히 저속하고 평범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종래의 낭만주의적 정사 이야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그야말로 객관적이고, 몰개성적이고, 무감동적인 기술(記述)을 구사함으로써 리얼리즘의 새 소설미학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플로베르의 이런 객관적 현실묘사를 대할 때마다 우리는 “천사는 보이지 않으므로 그리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동시대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Flaubert, 1819~ 77)를 떠올리게 된다. 1850년에 ‘오르낭의 매장’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자동기술’ 방법에 의해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 미학에 앙드레 브르통(Andr Breton, 1896~1966)만큼 충실했던 시인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초현실주의 제 1차 선언’(1924)을 작성하여 발표한 이론적 대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적 실천에 있어서도 줄기차게 원칙을 준수한 ‘초현실주의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거점으로 하여 전개된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서로 이념적 동질성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과묵한 미로가 그의 대담집 ‘이것만이 내 꿈의 색깔’에서, 브르통과의 내밀한 관계를 솔직히 털어 놓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 사이의 인간적 우정이 남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허심탄회한 속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음에도, 미로와 브르통은 또한 미움과 경계심으로 서로를 비방하고 못마땅해 하는 특이한 앙숙이기도 했다. 브르통은
현대 소설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1922)는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와 함께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3대 거장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전 7권 15부로 된 장대한 ‘의식의 흐름’의 드라마를 기록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쌍벽을 이루는 ‘20세기 최대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 나오는 ‘마들렌 과자’ 이야기는 무의식적 기억에 의한 환기를 통해 과거를 생생하게 재구성하는 프루스트의 소설미학을 극명히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마르셀은 어느 겨울날 어머니가 마들렌 과자를 곁들여 내놓은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신다. 그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차 속에 담근 뒤 입술에 갖다 댄다. 과자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마들렌 과자가 불러일으키는 맛의 기억에서 비롯된 기쁨이다. 일요일 아침 콩부레에서 레오니 이모에게 아침인사를 하러 갔
“비둘기들이 걸어 다니는 이 조용한 지붕은/소나무들 사이, 무덤들 사이 꿈틀거린다/올바른 정오가 거기서 불로써/바다를 구성한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를!/오, 한줄기 사념 뒤에 오는 보상/신들의 고요에 쏠린 오랜 시선이여!” 이렇게 시작되는 폴 발레리(Paul Valry, 1871~1945)의 시 ‘해변의 묘지’는 20세기 상징주의 시에 있어 가장 완벽한 언어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명편으로 지목된다. ‘흰 돛단배’를 ‘비둘기’에,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지붕’에 비유하는 독특한 은유법을 구사함으로써 또 하나의 시적 기적을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인의 고향인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세트에 있는 바닷가 공동묘지를 무대로 해서 펼치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명상의 세계는 그대로 정오의 태양이 숨 막힐 듯 내리쬐는 한 폭의 바다 풍경을 선명히 떠오르게 한다. 발레리는 프랑스 최고의 ‘국민 시인’ 또는 ‘지성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국장(國葬)을 치루는 영광스런 예우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수많은 크로키며 데생들을 남겼다. 현재 세트의 ‘발레리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연주의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와 근대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3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우정 이야기는 한 편의 흥미로운 소설을 방불케 한다. 그들 사이의 우정이 처음 싹트기 시작한 것은 남프랑스 엑상 프로방스 시절의 개구쟁이 소년시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졸라는 파리에서 태어났으나 엑상 프로방스로 이사함에 따라 거기서 부르봉 중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런데 동급생 중에 세잔이 있었던 것이다. 졸라는 7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데다 병약했고 지독한 근시여서 자주 같은 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 때마다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세잔이 나타나 개구쟁이들을 물리쳐주곤 했다. 세잔이 처음으로 못 되게 구는 아이들을 혼내준 다음날 졸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선물했다. 세잔이 훗날 정물화의 소재로 자주 사과를 선택하여 그린 것은 이 ‘유년시절의 사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던 그가 그린 정물화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1890~94, 사진)은 구성원리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한 선구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른다/우리들의 사랑을/나는 기억해야만 하는가/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왔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시 ‘미라보 다리’는 아마도 현대 프랑스 시 가운데서 가장 널리 대중들이 읊조리는 비가(悲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폴리네르를 단지 잃어버린 시간과 덧없음의 회환에 잠겨 안타까이 회상하는 현대적 애가의 시인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쉬르레알리즘’(초현실주의)이라는 용어를 역사상 처음으로 만들어낸 시인이며, ‘큐비즘’(입체주의)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만들어낸 전위적 미술비평가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입체파 운동의 선두에서 이론적 대부 역할을 한 ‘새로운 에스프리’의 기수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미학적 명상-입체파 화가들’(1913)에서, 입체주의가 ‘모방의 예술’이 아니며 새로운 경지에까지 도달하려는 ‘개념의 미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인식된 사실 또는 창조된 사실을 표현함으로써 3차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미학이라 강조한다. 그는 대표적인 입체파 화가로서 조르주 브라크(Geroges Bra
“내 학생 때의 공책 위에/ 내 작은 책상과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쓴다 그대 이름을” 이라는 외침으로 시작되는 ‘자유’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프랑스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폴 알뤼아르(Paul Eluard, 1894~1952)와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거장 파블로 피가소(Pablo Picasso, 1881~1973)와의 관계는 남다른 예술적 동지애로 묶여진 드문 예에 속한다. 그들은 특히 ‘게르니카의 비극’이라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인간말살의 전쟁과 파괴에 대항하여 각각 시로, 그리고 그림으로 공동의 예술적 항거를 강렬하게 보여준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스페인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1937년 4월 26일 일어난 게르니카 마을의 처참한 파괴는 이 두 예술가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무차별 쏟아 붓는 엄청난 양의 폭탄투하로 거의 모든 주민들이 몰살 당하는 역사상 가장 끔찍스런 인간말살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국의 불행한 대사건에 눈 감을 수 없었던 피카소는 분연히 붓을 들어 그 해 6월 3일 ‘게르니카’(1937, 사진)라는 제목의 대형 그림을 완성한다. 6월 4일 그 그림은 엘뤼아르의 시(詩) ‘게르니카의 승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