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자동기술’ 방법에 의해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 미학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만큼 충실했던 시인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초현실주의 제 1차 선언’(1924)을 작성하여 발표한 이론적 대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적 실천에 있어서도 줄기차게 원칙을 준수한 ‘초현실주의의 산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거점으로 하여 전개된 초현실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서로 이념적 동질성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과묵한 미로가 그의 대담집 ‘이것만이 내 꿈의 색깔’에서, 브르통과의 내밀한 관계를 솔직히 털어 놓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 사이의 인간적 우정이 남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허심탄회한 속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음에도, 미로와 브르통은 또한 미움과 경계심으로 서로를 비방하고 못마땅해 하는 특이한 앙숙이기도 했다. 브르통은 돈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돈이라는 악취를 풍기는 짐승’에게 자진해서 무릎을 꿇은 타락한 속물 화가의 전형으로 미로를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브르통의 본질 문제에서 벗어난 가시 돋친 비판에 대해서 미로는 “그의 평가는 곱씹을 맛이 별로 없고, 언제나 애매하다”고 응수하며, 자신과 브르통 사이에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있음을 고백한다.
“나는 브르통에 대해서 늘 어느 정도 경계심을 갖고 있다. 너무나 독단적(교조적)이고 지나치게 폐쇄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유롭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지 않았다. 그는 회화의 배후에서 여러 가지 관념을 보려고 했다. 그는 의외의 기습을 즐거이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이론이라는 것과는 아예 담을 쌓은 사람이다.”
이렇듯 미로와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운동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평생 함께 협력한 동지이면서 동시에 서로 가차 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은 영원한 맞수로 싸우고 또 좋아했다.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시골 사람 미로와 초현실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채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무대로 해서 산 도회인 브르통 사이에는 아무래도 커다란 기질상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달팽이·여인·꽃·별’ 미로 작(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