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거목 박경리씨가 타계했다. 우리는 이 화창한 신록의 계절에 문학의 참된 스승을 잃었다. 그가 남긴 작품과 그가 문단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아쉽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그는 지난해 7월 폐암 선고를 받았으나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투병하다 지난달 뇌졸중으로 쓰러져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오던 중 어린이날 마침내 숨을 거뒀다.
향년 82세로 타계한 그의 일생은 그의 소설 속 여인들의 비극적인 운명 만큼이나 굴곡진 것이었다.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통영 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결혼했으나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며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다.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표류도' '김 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굵직굵직한 소설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나 '토지' 1부를 집필하면서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암과 사투를 벌인 끝에 병마를 이겨낸 박씨는 유신정권에 저항하던 사위 김지하 시인의 투옥으로 또 한차례 마음 고생을 겪었다. 그러나 군사정부 아래 어떠한 시련도 창작에 대한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1897년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서울, 만주, 일본을 거쳐 1945년 다시 평사리 섬진강 가에서 주인공 최서희가 해방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대하소설 '토지'는 작가의 대표작이자 우리 문학의 큰 줄기를 이루는 작품이다.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뒤 1994년 8월15일 '문화일보'에 실을 마지막 원고를 탈고하기까지 전체 5부가 완성되는데 장장 25년이 걸렸다. 작품에는 동학농민전쟁, 을사보호조약, 청일전쟁, 간도협약, 관동대지진, 형평사 운동, 만주사변 등 역사적 사건이 무수히 등장한다. '토지'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씨줄로 이름없는 민초들의 삶이 날줄로 엮어진다. 등장인물만 해도 578명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다.
토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박씨는 문학적인 성과 외에도 환경과 생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 땅의 사람과 자연을 사랑했으며 생명 하나하나의 존엄성이 존중돼야 한다는 생명사상이 박씨의 작품 속에서 엿보인다. 강원도 원주시 오봉산 기슭에 토지문화관을 설립해 환경과 생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터전 역할을 해왔고 1993년 환경운동연합 출범 당시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박씨는 '토지' 완간 후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했다. 지난해에는 미완성 소설과 산문들을 묶어 13년 만에 작품집 '가설을 위한 망상'을 내놓았으며 최근 '현대문학' 4월호에 신작시 3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과 고향 통영시, '토지'의 무대가 된 경남 하동에는 애도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학혼을 기리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