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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③ 겨레사랑을 인류주의로 승화시키다-백범 김구

백범의 민족주의는 어느 특정의 정치사상에 갇히지 않은 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길로 넓게 열려져 있었으며, 세계주의와 어긋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구시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통일을 남의 힘에 의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경험과 연장선상에서 일궈내려 했던 것 역시 더없는 역사적 유훈으로 남겨져 있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백범이건만, 그의 사상과 이념을 올곧게 이해하는 이는 정작 많지 않은 것 같다. 백범을 두고 ‘반공주의자’라 하기도 하고, 또는 ‘용공주의자’라 하는 등 세간의 엇갈린 평가는 그런 단면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분단과 반공의 질곡에서 빚어진 흑백논리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백범 사상의 진실이 크게 오해를 받거나 폄훼되는 일이 적지 않다.

독립과 통일 위한 실천이념 제시
백범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만난 것은 1920년대 독립운동을 펼치던 때부터였다. 이후 백범은 때론 ‘반공’의 입장에 서기도 했고, 민족을 위해서는 ‘용공’도 사양하지 않는 사상의 포용성과 다원성을 드러내었다. 민족을 외면하고 계급해방에만 치우친 공산주의는 반대했지만, 민족독립과 통일을 위한 길이라면 공산주의와의 통일전선도 마다하지 않던 백범이었다. 때문에 1940년대 좌와 우가 어우러진 통일전선형태의 임시정부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백범에게는 좌파의 극단적 계급주의와 친일파를 제외한 전 민족·각 계급·각 당파의 공동 이해에 의한 민족 단결의 독립운동과 통일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지도자, 겨레의 큰 스승인 백범 사상의 진면목이다.

미소 양국의 원심력에 의해 분단으로 치닫던 1949년 벽두 신년사를 통해 백범은 “소련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도 싫고,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해도 독점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시장화 하는데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해를 위해 미국과 소련의 편에 붙어서 분단을 부추기며 민족을 혼란시키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백범의 노선이자 참모습이었다.

어느 한 사상에 편향되거나 매몰되지 않았던 백범 사상의 요체는 ‘민족의 자주 독립과 통일, 자유와 문화를 통한 인류주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백범의 사상은 ‘겨레사랑’이라는 원동력을 바탕으로 배태되고 형성되었다. 때문에 백범 사상은 사상 그 자체로 성립하기보다,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의 실천적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근대적 전환기에서 상민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봉건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외쳤고, 일제 침략으로 망국의 통한을 당하면서는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해방과 함께 나타난 분단 상황에서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통일국가 수립의 길을 걸어 나갔다.



열린 민족주의와 인류주의의 길
백범의 민족주의는 어느 특정의 정치사상에 갇히지 않은 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길로 넓게 열려져 있었으며, 세계주의와 어긋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세계주의를 갈등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민족주의가 진정으로 발전할 때 국제주의, 세계주의가 꽃피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백범의 이 같은 열린 민족주의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적 차원의 인도주의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기반을 열어 나갔다. 즉, 독립운동의 가치를 식민지해방이라는 1차적 목표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반인류적 행위에 대항하여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인도주의 운동으로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누구보다 숭상한 그는 어떠한 독재정치도 배격하면서 동포를 향해 ‘결코 독재정치가 되지 말도록’ 조심할 것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변함없는 사상적 신념이었으며, 해방 후에도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힘을 쏟았다. 그런 점에서 백범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

또한 그가 바란 우리나라는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문화의 힘으로 이룩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였다. 인간의 행복을 문화에서 찾았던 그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돈과 힘보다는 문화에서 찾으려던 평화주의자이며 인류주의자였다.

꺼져가던 독립의 불씨 되살려
백범의 겨레사랑과 웅혼하고 깊은 사상은 대하드라마와도 같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속에서 더욱 짙어져 갔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교차점에서 살았던 그가 민족운동에 투신한 것은 1893년 동학에 입교하면서였다. 양반사회에 저항하면서 동학에 입교한 소년 백범은 18세 때 팔봉접주로서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했다가 그 뜻이 좌절되자 주자학의 의리를 받아들여 의병전쟁에 나섰으며, 1896년 대동강 하류 치하포에서 일본 낭인 쓰치다를 처단하는 장거를 이룩하였다. 이 일로 사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인천감옥을 탈출하여 한동안 마곡사에서 승려로 생활하였으며, 1903년에는 기독교에 입교하는 등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구시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대 변화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기도 했다.

10대 소년에서 20대 청년으로 성장하는 동안 동학과 주자학, 불교, 기독교를 넘나들면서 그의 세계관은 더욱 넓어져 갔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의 방략도 의병의 길에서 계몽주의로 전환되어 갔다. 1907년 신민회에 참가한 그는 1909년 안중근 의거로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11년 안명근사건(안악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105인사건으로 2년형이 추가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4년 감옥에서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백정범부(白丁凡夫)’란 뜻으로 아호를 백범(白凡)으로 정하였다.

1919년 상해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청하면서 경무국장을 맡은 이래 1922년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역임하고, 임시정부가 극도로 어렵던 1927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어 꿋꿋이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독립운동의 불사조와 같은 그의 카리스마는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여 독립운동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때 더욱 광채를 발휘하였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그는 일제 심장부를 겨냥한 1932년 1월 이봉창의 도쿄의거, 1932년 4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등의 특공작전을 과감하게 단행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이로써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었다. 일제가 1930년대 후반 김일성 체포를 위해 내건 현상금이 5만원이었던 것에 비해 백범의 현상금이 60만원에 달했다는 사실은 편린이나마 백범의 독립운동적 위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통일 위한 제2의 독립운동
독립운동의 지도자, 백범은 그렇게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으며, 임시정부도 1940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조직을 확대·강화, 명실상부한 정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일항전의 무력 기반을 마련하는 등 전시체제도 확립해 갔다. 그 과정에서 미군 OSS와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본토 진입작전에 대비해 갔다. 그런데 일제의 조기 항복으로 광복군의 본토 진입작전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고 말았다.

해방 후 임시정부의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환한 백범은 분단을 극복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아래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소가 분할 점령한 상황에서 백범이 홀로 분단을 막아내기란 불가항력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백범이 아니었다. 그는 ‘38선을 베고 쓰러질’ 각오로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향하였지만, 끝내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비록 분단을 막지는 못했어도, 그가 남긴 자취는 통일운동의 첫걸음이자 소중한 유산으로서 민족사에 빛나고 있다. 그리고 통일을 남의 힘에 의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경험과 연장선상에서 일궈내려 했던 것 역시 더없는 역사적 유훈으로 남겨져 있다.

백범은 일찍이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라는 교훈을 남겼다. 세계화의 혼돈 속에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가 가슴깊이 새겨야 할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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