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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⑩ 서원건립으로 이상적 학교교육 모델 제시하다

‘겨레의 스승’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분들 중에서도 퇴계 선생은 그 으뜸이다. 그의 삶과 학문은 산봉우리처럼 우뚝하고 바다처럼 깊고 학처럼 고고하다. 그는 치열하게 공부했고 치열하게 가르쳤다. 제자를 한없이 아꼈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자연을 갈구했다. 자신을 낮추며 세상을 품었고, 준엄한 기대로 삶의 본질을 한 치의 틈도 없이 지켜냈다. 또한 그가 이룩한 학문은 이후 오랫동안 한국인들 배움의 좌표가 되었다.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이기에 퇴계의 삶과 학문이 지니는 의미는 그 무게를 따지기조차 어렵다.

공부론·정치론·자연론 등 주자학적 지혜 남겨
“배움은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한 삶의 과정”



평생 명예와 권력 뿌리쳐
퇴계의 일생에는 크게 세 단계의 전환이 있다. 첫 번째는 출생 이후 33세까지의 시기로서, 주로 집을 배경으로 공부한, ‘재가수학기(在家修學期)’라고 칭할 수 있다. 두 번째는 34세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49세 지방군수직을 끝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을 때까지의 시기로서, ‘출사기(出仕期)’로 이름할 수 있다. 세 번째는 50세 관직을 떠난 후 고향에 돌아와 강학에 전념하다가 70세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시기로서, ‘은거강학기(隱居講學期)’로 명명할 수 있다. 이상 세 단계로 보는 퇴계 일생은 빠르고 역동적이라기보다는 느리고 온화하며 점진적으로 전개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겉으로 보기에 50세 이후 관직을 떠나 고향에서 강학에 몰두하기 전까지 퇴계의 삶은 특별히 남다른 점이 없다. 우리가 퇴계를 겨레의 스승으로 꼽는 근거가 주로 그의 ‘학문’과 ‘교육’에 대한 성취라고 보면, 그것은 50대 이후에나 본격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주요 저술들도 거의 이 때 쓰여 지고 제자집단과의 긴밀한 교육적 관계의 형성도 이 때 이루어진다.

그러면 퇴계의 일생에서 두 번째 단계까지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퇴계가 관직이 주는 명예와 권력의 맛을 뿌리치고 고향산천에 은거할 수 있게 한 내공은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닐 것인데, 퇴계의 재가수학기와 출사기는 은거강학기의 걸출한 성취를 있게 한 내면의 힘을 배양하는 과정이었으며, 인격적․학문적 토대를 담금질 하는 과정이었다.

퇴계는 벼슬을 결코 무작정 추구하지 않고 과연 자신의 학문이 그 벼슬을 감당할 만큼 성숙되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한다. 따라서 관직 생활 중에 휴가를 얻게 되면 독서당(나라에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을 엄격하게 가려 뽑아서 학문 연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한 곳)에 나아가 마음을 다해 공부에 임했다. 49세에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를 맡으면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서원화하고 이후 서원 중흥의 이념적, 실천적 토대를 마련한 것은 행정가로서의 업적의 백미이다.

참됨 실현하는 위기지학의 삶
관직 생활에도 어느 누구보다 충실했던 퇴계였지만, 늘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학문과 교육에의 열망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낙향한다. 한편으로는 정치나 행정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적성이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이 성숙하지 않은 자가 단지 출세나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런 저런 벼슬을 덥석 맡아서는 안 된다는 출사철학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퇴계는 미련 없이 낙동강 근처 고향으로 내려가 고즈넉하고 아담한 교육공간을 마련해서 오랫동안 꿈꾸었던 학문과 교육에 침잠한다.

퇴계는 교육공간으로 양진암, 한서암, 계상서당을 거쳐 62세에는 도산서당을 마련하여, 점점 불어난 제자들과 교유하며 강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퇴계의 명망은 높아지고 이에 따라 일방적 추천과 임명에 의해 각종 높은 벼슬이 주어지지만 퇴계는 사양과 사직으로 일관한다. 그가 사양하거나 사직하는 태도는 집요한 것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높은 벼슬이 부여되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된다. 세상은 모든 세속적 욕심을 비워내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즐거움에 매료된 퇴계에 반했던 것이다. 위기지학의 즐거움 속에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비롯해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자성록(自省錄)’ 등 대표적 저술이 이루어졌다.



교육 이상 꿈꾸며 서원 부흥 주도
퇴계가 보여준 주자학적 지혜 중에서 실제로 이후 조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또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공부론, 학교론, 정치론, 자연론이다.

우선 공부론에서 공부 및 배움에 대한 퇴계의 견해를 잘 엿볼 수 있는데, 그 정수는 ‘성학십도’에 잘 드러나 있다. ‘성학십도’는 인간됨의 완성에 이르기 위한 배움(聖學)에 대해 열 가지의 도설로 설명한 저작이다. 퇴계는 여기에서 인간은 우주적, 신적 본성을 자신의 본질로 하는 사랑(仁)의 존재로서,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실현해 내는 것이 삶과 공부의 목표임을 말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경공부(敬工夫)’를 강조하는데, 경은 마음이 잡다한 생각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고요하게 깨어있는 상태, 마음의 본연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두려워하듯 삼가고 또 삼가는 태도를 의미하며, 동시에 이를 위해 몸가짐이 정제된 상태를 의미한다. 경은 삶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그리고 배움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루어져야 할 공부이다.

한편 퇴계는 경을 기저로 해서 이루어지는, 소학(小學; 일상사로부터 좋은 생활 태도를 몸에 익히는 과정)에서 대학(大學;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진리를 경험적으로 탐구하고 삶에 구현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공부의 단계 및 과정도 강조한다.

학교의 본질이 위기지학을 돕는데 있음을 잘 보여주는 퇴계의 학교론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그의 서원교육에 대한 견해와 실천이다. 퇴계는 자신이 생각하는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특히 서원교육의 부흥을 주도했다. 기존의 향교를 비롯한 관학이 세속적 명리만을 추구하는 비교육적 공간으로 곳으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지식인과 사회의 풍속이 타락했다는 우려에서, 다름 아닌 위기지학의 교육정신을 관철하는 새로운 교육의 장을 야심차게 만들어 갔는데 그것이 서원이다.

그는 서원의 교육철학을 만들어 보급했고, 서원건립이나 서원에 대한 국가지원책 마련에 앞장섰으며, 스스로 도산서당을 만들어 서원교육의 모범을 보였다.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보여준 교육적 사례는 한국교육의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학교교육의 모델이었다고 해도 좋다.

삶의 진실 깨우는 철학 사상
퇴계는 교육만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과 실천에 있어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는 행정관으로서의 여러 치적에서도 나타나거니와 더 주목할 점은 ‘성학십도’나 여타 시무책에 드러나는, 통치자의 자세와 역량에 대한 퇴계의 견해이다. 퇴계는 선조의 통치를 돕기 위해 심학을 내용으로 하는 ‘성학십도’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퇴계의 결론은 정치 역시 마음이라는 것이다.

퇴계는 또한 자연을 닮고자, 자연과 합치되고자 갈구했다. 퇴계에게서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하나였다. 인간의 완성은 결코 자연을 떠나서, 자연을 소홀히 하거나 착취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최고의 공부를 위한 최고 공간은 자연이었다. 퇴계가 교육적 이상의 실현 공간으로 의미부여 했던 서원이 늘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입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늘 찾으며 몸과 마음을 맡겼던 청량산, 강과 대나무와 매화가 어우러진 도산서당에서 퇴계는, 자연을 닮은, 청명하고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철학을 만들어 갔다.

퇴계는 위기지학에 대해 “깊은 산골의 무성한 숲에 있는 한 포기의 난초가 하루 종일 향기를 내면서도 자신이 향기롭다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표현한 바 있다. 퇴계 자신이 향기 가득한 난초였다. 결코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다만 스스로 즐거워서 한 공부이고 학문이었지만, 그로부터 향기가 났고, 그 향기는 퇴계가 살았던 깊은 산골만을 뒤덮지 않고 이 산 저 산을 넘어 금수강산 전체로, 금수강산을 넘어 이 나라 저 나라로, 그리고 시간을 타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흘러왔다. 특히 그의 공부론, 학교론, 정치론, 자연론은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많은 삶의 진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과연 공부란, 학교란, 정치란, 자연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그 대답을 찾지 못해 우리를 어둠 속에 해매이도록 하는 이 문제들에 대해 퇴계의 향기는 무언의, 그러나 풍부한 가르침을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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