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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⑫ 일본의 결전준비

백제가 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야마토 조정은 곧바로 내륙이 아닌 바닷가 항구인 나니와(오사카)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661년 1월에는 또 다시 지금의 후쿠오카인 나노쓰로 천도를 감행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백제구원을 위한 당시 야마토국의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가 있다.




660년 8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무너져 버렸다.

의자왕과 왕자들은 자결하고 페르샤 융단이 깔려 있었다던 그 화려한 왕궁은 한줌의 재로 화하였다. 이러한 급보가 일본 야마토(大和)조정에 전하여 진 것은 660년 10월, 그러니까 백제가 망하고서 두 달 후의 일이다.

당시 일본의 천황은 여제(女帝)로 사이메이(斉明)천황이었다. 청천벽력인가? 날벼락인가?

지금까지 하늘처럼 믿고 의지했던 피로 맺어진 동맹국 백제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사실 사이메이 천황은 모계가 백제혈통이었으며, 당시의 재상인 후지하라 가마다리는 645년에 백제에서 건너가 재상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인물로 모든 군사권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이때 일으킨 정변을 일본은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 하며, 이로써 왜가 일본이란 국명으로 바뀐다. 이를 본따 훗날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만드는 것으로 일본의 대화개신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관계로, 야마토 조정에서는 즉시 대책회의가 열리고 두 달 후인 660년 12월에는, 수도를 아스까(飛鳥,지금의 나라윗쪽)에서 나니와(浪花, 지금의 오사카)로 옮긴다.

이걸 한번 생각해 보자. 백제가 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곧바로 내륙이 아닌 바닷가의 항구로 수도를 옮기는 이 신속한 대응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것도 단 두 달 만에.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다음해인 661년 1월에는 또다시 지금의 후쿠오카인 나노쓰(那乃津)로 천도를 감행한다. 이것은 나니와(오사카)에서는 아무래도 백제가 너무 멀기 때문에 백제와 가장 가까운 규슈로 수도를 옮겼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백제구원을 위한 당시 야마토국의 비장한 각오를 엿볼 수가 있다.

한편 백제의 수도가 함락된 직후 신라군은 전부 철군해 버리고, 사비성에는 당군만 남아 주변의 백제군들과 고군분투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백제가 무너진 후 잔류를 고집하는 당군과의 이견으로, 신라군은 당군을 몰아내기위한 방편으로 일단 철군하고 백제 소탕전을 포기한 까닭이었다. 따라서 백제는 수도만 무너졌을 뿐, 각 지방의 군대는 온존해 있었으며, 이러한 정보는 속속 야마토국에도 전해졌고, 아울러 백제 부흥군의 원군요청은 빗발 같았다.

그러나 야마토국은 아무리 빨리 원군을 보내고 싶어도 준비된 군대도 없었을 뿐 더러, 수송에 필요한 다량의 배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사이메이(斉明)천황은 수송선 만들기에 전력을 투구하는 한편, 군도 급조해 배가 완성되는 해인 663년6월에 백마강‘최후의 결전’을 벌린다. 일본에서는 배 400척에 2만7000명의 군대가 박시(朴市, 일본말로는 에찌)장군을 총대장으로 출진하였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해외출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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