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대모화의 화신’으로 낙인…1980년대 이후 재평가
‘나말여초’ 전환기의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
우리 것 부각, 민족의식을 사회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아불교·도가·유교 체득한 천재성 갖춰최치원의 사상적 경향을 살펴볼 때,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유자(儒者)로 자처하면서도 불교 및 도가사상에 정통했으며, 그 밖의 여러 사상을 한 몸에 체득했던 천재적인 사상가로서 한국사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단순한 문장가가 아니요, 사상가이며 철학자였으며, 사변적이거나 논리적인 이론가가 아니었고 삶을 통해 도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의 철학사상은 차원이 높고 정연한 체계와 구조를 이룬다.
최치원은 ‘나말여초’라는 역사적 전환기의 정치적·사상적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이었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6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던 대표적인 중국통이기도 했다. 근자에 와서는 한국과 중국의 친선·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중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다.
최치원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일찍이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김춘추·최치원·김부식을 사대모화(事大慕華)의 화신(化身)으로 단죄한 바 있다. 특히 최치원에 대해서는 ‘조선상고사’에서 “최치원의 사상은 한(漢)이나 당(唐)에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을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했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보지 못했으니, 그 주의(主義)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지나화(純支那化)하려는 것뿐이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1980년대까지 우리 학계의 통념으로 내려왔다. 최치원에 대한 연구가 상당한 경지까지 진척된 오늘에 비하면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주체적이고 보편적인 문명 지향최치원의 철학사상을 연구함에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중요한 두 축을 이룬다.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체의식과 문명의식은 보편성과 주체성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그의 주체적 정신이 특수성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문명세계의 지향은 곧 보편성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 필자는 최치원의 주체의식을 ‘동인의식(東人意識)’이라 명명한 바 있다. ‘동인의식’은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의 ‘주체의식’ 또는 ‘자기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문명지향 의식을 ‘동문의식(同文意識)’이라 한 바 있다. ‘동문’ 또는 ‘동문세계(同文世界)’란 말은 오늘날 널리 쓰이는 국제화·세계화의 의미와도 상통하는 것이지만,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중국 중심의 ‘보편문화’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적 특수성을 의미하는 ‘인(人)’과 문화적 보편성을 의미하는 ‘문(文)’ 그리고 각각 그것을 수식하는 ‘동(東)’과 ‘동(同)’은 서로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의 학술명사로써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최치원의 철학사상은 현실적으로 ‘동인의식’과 ‘동문의식’의 두 축으로 전개됐다. 전자는 민족적 차원에서, 후자는 국제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둘 다 최치원의 독창적인 사상이라 할 수는 없고 당시의 시대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치원은 분열과 갈등으로 난마(亂麻)처럼 뒤얽힌 당시의 어지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통합의 원동력으로서 민족의식을 부르짖었고, 아울러 우리의 문화적 긍지와 문화 창조의 역량을 최고도로 발휘시켜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융평사상(隆平思想)의 한 발로로서의 문명의식을 고취했다. 종래 최치원을 사대모화주의자라고 본 것은 그의 철저한 동인의식을 지나쳐 보았을 뿐만 아니라, 문명세계를 지향하는 동문의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출신국에 따라 차이가 없다”신라 하대에서 중요한 사상적 동향의 하나로 동인의식의 대두(擡頭)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지식인 계층 내부의 의식세계가 투영된 이 동인의식을 크게 부각시키고 고양한 학자는 곧 최치원이다. ‘우리 것’을 찾으려는 ‘우리 의식’은 바로 동인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최치원의 철학사상은 바로 이 동인의식이 핵심이 되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동인의식’은 최치원 사상에 있어 결정(結晶)의 하나라 할 만한 것으로서, 그의 철학사상의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을 짐작하게 하는 관건이기도 하다. 동인의식은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사상적 밑뿌리를 캐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한 ‘현묘한 풍류도(風流道)’를 지닌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동인의식으로 표출됐음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한 뒤 그는 거의 모든 면(특히 사상·종교면)에서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찾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여기서 최치원 사상의 핵심과 통일성을 찾을 수 있다.
최치원은 고유사상을 비롯한 우리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이를 선양함으로써 민족주체의식을 드높였다. 문화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그는 풍류도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전통을 보편적 가치기준과 개념을 가지고 해석·설명하여, 당시 국제무대인 당나라에게까지 선양하려 했다. 더 나아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탐색해 우리의 것을 ‘세계의 것’으로 만들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다. ‘난랑비서’에서 고유사상인 ‘풍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가치를 부각시키면서도, 풍류를 당시의 보편적 가치 기준으로 해석,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은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사적 흐름과의 관련선상에서 이해하고, 또 보편적 가치기준과 개념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측면에서의 국제화·세계화에 큰 공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문화의 보편적 성격에만 함몰되어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망각하거나 외면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최치원은 ‘진감선사비문’ 첫머리에서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교를 하고 유교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고 했다. 즉,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인·인도인·신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출신국에 따라 진리와 거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국경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성,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 그리고 진리를 향해 중국이나 인도로 향하는 신라인의 향학열과 진취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위에서 ‘사람은 출신국에 따라 차이가 없다’(人無異國)는 선언은 매우 중요하다. 진리의 보편성과 인간 본질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독존적(獨尊的) 경향이 유난히 강했던 당나라에 대해 ‘인무이국’의 논리를 가지고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의식 갖춘 국제인 추구최치원은 역시 ‘진감선사비문’ 첫머리에서 구도(求道)하는 학인들의 열정과 고학상(苦學狀)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서쪽으로 대양(大洋)을 건너 통역을 거듭해 가며 학문에 종사할 적에 목숨을 통나무배에 맡기면서도 마음은 보배의 섬(寶洲: 西域)에 달려 있다. 빈 채로 갔다가 올차게 돌아왔는데, 험난한 일을 먼저하고 얻는 바를 뒤로 하였으니, 역시 보옥(寶玉)을 캐는 자가 곤륜산(崑崙山)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驪龍)이 사는 물속의 깊음을 피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최치원이 중국 유학의 과정을 밟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절실하고 호소력 있는 서술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구도의 길이 이처럼 목숨을 건 험난한 길이었기에, 최치원은 유학의 목적지 가운데 하나인 당나라를 불교에서 이른바 열반상락(涅槃常樂)의 경지를 가리키는 ‘피안(彼岸)’에 비유하기도 했다.
당시 신라가 동아시아 문화권 중에서 비교적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해위가(四海爲家)’를 표방하며 문화적으로 자신만만했던 당나라의 개방적인 문화정책과 문명세계를 향한 신라인들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하나로 어우러졌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최치원의 ‘주체의식’과 ‘문명의식’은, 신속화·정보화·세계화로 특징 지워지는 이 시대에, 동서 문명의 보편성 추구와 세계화 지향을 시대적 과제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국제화와 주체의식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기게 한다. 넓게 열린 마음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가장 ‘민족적’이고 ‘원형적’으로 잘 살려서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 바람직한 국제화요 세계화라고 할 때, ‘뿌리 있는 국제인’이 되기를 염원했던 최치원의 주체적인 사고와 열린 자세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것이 바람직한 국제화요 세계화인지 일깨우는바 크다고 할 것이다.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인 ‘인간주체’의 문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화적 보편성 및 독자성의 문제는 천여 년 뒤인 오늘에서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화두로 남아 있다. 최치원은 그저 과거 완료형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으로 살아 있다. 그의 철학사상 역시 단순히 역사상의 정신적 유산으로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연면히 생동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