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일본의 혼인 동맹은 그저 허무맹랑한 일본 역사 이야기일까.
2000년대 실제로 충남 공주에 있는 무녕왕릉 발굴조사에서 나온 왕의 위패에서, 그가 태어난 것은 일본 규슈북단의 가라쓰(唐津=원래는 韓津)의 앞섬인 가가라지마(加唐島)라고 하는 기록이 발견됐다. 이는 왕녀가 산달이 되어 친정인 일본으로 아기를 낳으려고 아츠카로 돌아가는 도중에 조산해 이 섬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가가라섬 ‘가거라’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잘 가거라’라는 말이란다.
무녕왕(武寧王)은 백제 25대 왕으로써 501~523년까지 재위하였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북방영토를 넓히고 농업에 힘을 썼으며,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한 왕이었다.
이야기를 돌려 고대의 소가 세력은 점점 비대해져 천황을 능가하게 되고, 백제의 명을 업신여기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백제는 그 대책으로 새로운 밀사 가마다리(鎌足)를 파견한다. 가마다리는 백제의 특사를 분장해 왕의 선물을 진상하는 척 하다가 갑자기 단도를 빼어 대신 소가이루카를 죽이는 대정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일본사의 3대사건인 ‘대화개신’(大化改新)으로 645년 6월 13일의 일이다.
이리하여 다시 백제에 충성하는 가마다리파가 정권을 잡고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개혁 작업을 통해 일신되어진 때에 날아온 사비성함락 비보였기 때문에 발 빠르게 일사분란한 천도가 이루어졌고, 또 강력한 군대를 백제에 파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대의 파견에도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유민들은 지금까지 약간 낮게 취급했던 ‘왜’가 자신들이 살아야 하는 땅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우선 작다는 뜻의 왜(倭)라는 국호를 해를 중심으로 나가는 나라, 일본(日本)으로 바꿨다.
사실 ‘왜’가 국명을 ‘일본’으로 바꿨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역사서에는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으며, 한국의 ‘삼국사기’에 딱 한군데 그 이유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왜로부터 사자가 와서 ‘왜의 이름을 미워해 국명을 일본으로 바꿨다’고 하는 것을 알리는 대목이 있다.
AD712년에 쓴 ‘고사기’에는 일본이라는 이름이 안 나오는데, 그로부터 8년 후인 AD720년에‘일본서기’가 나오면서 처음 일본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이 ‘일본’이란 말은 백제의 유민들이 사라진 조국을 그리워하며 통탄하다가 새로운 역사를 여기서 이루겠다는 각오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제작할 때 ‘백제 서기’ ‘백제 신찬’ ‘백제 본기’를 주로 인용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정작 참고한 도서는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신라 땅이 된 백제의 옛 땅에 미련을 버리고, 여기에 새로운 백제 ‘일본’을 건설하겠다는 강한 도전정신이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