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한 숲 속입니다. 어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이슬을 머금고 있습니다.
“왕을 배신하는 신하는 있어도 백성을 버리는 왕은 없는 것이여.”
할머니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이어집니다. 바위 뒤로 할머니의 옷자락이 보입니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에게로 다가가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허공을 걷는 듯 발은 제자리를 맴돕니다.
“은하야! 은하야!”
은비 언니가 흔들어 나를 깨웠습니다. 아직 방문에 어둠자락이 묻어 있습니다.
“찾았다. 할머니는 지금 산골짜기에 작은 왕국을 세우고 계시는 거야.”
“너 요즘 드라마 너무 많이 보는 거 아니야?”
머리를 빗던 은비 언니가 쿡쿡 비웃었습니다. 할머니의 왕국이 무너지기 전에 왕을 배신한 첫 번째 신하가 바로 언니였습니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은 하나의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는 왕처럼 살았습니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쌀을 나누어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약도 사다 주었습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사람들은 왕처럼 받들었습니다. 마을 사람 누구도 왕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왕의 창고는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과일들이 단지를 꽉 채웠습니다. 그것들은 언니와 나를 왕의 신하로 만드는 꿀떡이었습니다.
“할머니 호두 좀 더 주세요.”
“오냐. 기침에 호두가 좋다 카더라. 우리 은비 마이 묵거라.”
왕은 은비 언니를 끔찍이 생각해 주었습니다. 어려서 홍역에 걸려 기침으로 기관지가 많이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침에 좋다는 산초기름으로 전이나, 두부 무침을 해주었습니다.
“할머니, 난 군밤 먹고 싶어요.”
내가 샘을 내며 말하자 따끈따끈한 군밤이 나왔습니다.
“할머니 집은 없는 게 없는 왕국 같아요.”
“그라믄, 내가 바로 왕이라 카이.”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왕국에서 넉넉한 먹을거리는 언니와 나를 더욱 충성스런 신하로 만들었습니다. 갈 때마다 가득 차에 실리는 곡식들이 아빠와 엄마도 왕의 신하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년 전 할머니는 위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시골에 있는 땅과 집을 팔아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도시 생활을 답답해 하셨습니다. 고향 텃밭을 그리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좁은 뜰과 옥상에 고향의 텃밭을 옮겨 놓았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스티로폼 상자와 플라스틱 그릇은 멋진 화분이 되었습니다. 뜰과 옥상에는 곡식을 심은 화분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도 성이 안차자 화단에 있는 분재도 캐냈습니다.
올 봄이었습니다. 분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소나무와 소사나무가 윤기를 잃자 생기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화단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분재를 다 캐내고 상추를 심었습니다. 나는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아빠가 효자라도 이번에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퇴근하여 화단을 본 아빠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졌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누가 왜 그랬는지 아빠는 벌써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여기 있던 나무 어떻게 했어요?”
“천지 쓸 데도 없는 나무라가 캐냈다 아이가.”
“그럼 나무들은 어디다 두셨어요?”
“쑥 뜯으러 가면서 산에 옮깄다. 나무도 지 자리가 있는 법인데 집안에 철사로 감아 두면 죄받는데이.”
할머니는 왕답게 당당했습니다.
집안은 할머니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화분에서는 채소들이 잘도 자랐습니다. 창문으로 옥상을 내다보면 마치 들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옥상이 시골 들판을 닮아가던 어느 여름날 소나기가 우산까지 찢어버릴 기세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는 할머니의 화분에서 물을 넘치게 했습니다. 결국 화분은 버티지 못하고 흙과 함께 스티로폼 조각을 조금씩 뱉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흘러나온 흙과 스티로폼 조각들은 서로 뒤섞여 옥상의 배수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아빠, 옥상이 호수 같아요.”
창문을 내다보던 은비 언니가 넘치는 물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아빠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배수구를 뚫었습니다. 그리고는 화가 나신 듯 옥상의 화분 들을 아무렇게나 화단에 던져버렸습니다.
“이기 뭔 짓이고?”
경로당에서 돌아오던 할머니가 쓰고 계시던 우산을 내던지며 고함을 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물구멍이 막혀 물이 방으로 넘칠 뻔 했다고요.”
아빠는 할머니 앞에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신하에게 공격당한 왕의 얼굴은 금방 새파랗게 변했습니다. 비를 맞고 섰던 왕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도 할머니를 뒤따라 방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비에 젖은 안주머니에서 헝겊으로 만든 봉지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봉지를 비닐로 싸서 다시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할머니는 옷가지 몇 개를 보따리에 싸셨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 바삐 움직이던 할머니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눈물이 굵은 주름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어느새 내 눈에서도 울컥 눈물이 솟았습니다.
“할머니, 어딜 가려고요?”
“내 답답해가, 어댈 좀 댕겨올라 칸다.”
할머니가 집을 나서자 아빠, 엄마가 잘못했다며 말렸습니다. 하늘도 왕의 가는 길을 막아보려는 듯 장대비를 더욱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쩐지 할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껌만 질겅질겅 씹어대는 언니가 미웠습니다.
언니가 왕을 배반한 건 함께 산지 한 달쯤 지나서였습니다. 경로당 잔치에서 돌아오신 할머니 손에는 초코파이와 사탕이 들어 있었습니다.
“야들아, 이거 묵그라.”
할머니는 초코파이와 사탕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손 안에 있던 초코파이는 가루가 되어 있었고, 사탕은 녹아서 껍질 채 찐득거렸습니다.
“싫어요. 안 먹을래요.”
언니가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습니다.
“와, 무 봐라. 너거 줄라고 내 묵도 않고 일부러 갖고 온거데이. 니가 좋아하는 거 아이가. 어서 무라.”
할머니는 초코파이 든 손을 언니 앞에 더 가까이 내밀었습니다.
“더러워서 싫어요. 치우세요.”
“드럽다이? 그기 뭔 말버릇이고?”
“그럼, 손때가 묻어 찐득찐득 거리는 게 안 더럽단 말이에요?”
언니도 지지 않고 할머니를 흘겨봤습니다. 호두를 달라며 쫓아다니던 예전의 언니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부터 왕은 한 신하를 잃었고, 언니는 왕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하고 따로 살았으면 좋겠어.”
언니는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습니다. 그런 언니 입버릇처럼 할머니가 어쩌면 영원히 떠날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안 가면 안돼요?”
나는 할머니를 따라 나오며 말했습니다.
“내 어여 갔다 올텡께, 걱정 말고 드가거래이.”
“언제 오는데요?”
“몇 밤 자고 나면…….”
할머니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더니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할머니, 빨리 와야 해요.”
“오냐. 내 강생이…….”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몸을 돌렸습니다. 잰걸음으로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어깨가 바람 탄 갈대처럼 흔들렸습니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왕과 마지막 신하는 이렇게 눈물로 헤어졌습니다.
할머니의 빈자리는 골목이 먼저 알았습니다. 깨끗했던 골목에 휴지가 나뒹굴었습니다. 할머니의 고함이 떠난 집은 절간 같았습니다.
아빠는 이리저리 할머니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가실만한 곳 어디에도 할머니는 없었습니다. 다만 잘 있으니 찾지 말라는 전화 한 통이 다였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으려 다녔습니다.
“따르르릉”
“예? 응급실이라고요?”
어느 날 밤 전화를 받으시던 아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와 엄마를 따라 나도 나섰습니다. 언니도 걱정스러운 듯 옷을 챙겨 들고 뒤따라 나왔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구석에는 한 시골 할머니가 침대를 힘없이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침대에 우리 할머니가 누워있었습니다. 아빠가 달려가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이구, 이 할망구가 입만 열면 자랑하던 그 효자 아들인갑네.”
그제야 아빠는 옆에 있는 할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독사한테 물렸다 아이오. 큰손녀 기침 때문에 산초기름이 필요하다고 뱀골에 갔 다 아인교. 내가 그렇게 말려도 내 말 안 듣고는 굳이 간다 캐가……. 그래도 내 가 같이 가가 다행인기라.”
“그런데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와 만나게 된 것부터 말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산마을이 좋다며 낯선 산마을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곤 밭두렁에 손녀들이 좋아하는 호두나무, 밤나무를 심고, 아들이 좋아한다며 못난이 소나무와 소사나무도 심었다고 했습니다. 듣고 있던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신하는 왕을 배신해도 왕은 백성을 못 버리는 법이여.”
할머니의 말이 귓가에 새롭게 맴돌았습니다. 신하를 잃어가던 할머니는 시골에 초라한 작은 왕국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연락처는 어떻게…….”
눈물을 훔치던 엄마가 물으셨습니다.
“119 사람들이 옷을 뒤지더니 이걸 꺼내주데요.”
할머니가 내민 헝겊봉지 속에서 통장 두개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통장을 열어보았습니다. 언니와 내가 태어난 날 우리 이름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떨어져서 말없이 지켜보던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때 할머니가 눈을 뜨셨습니다.
“어머니!”
온 식구가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할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은비는?”
할머니는 자기를 미워하는 언니를 찾으며 웃으셨습니다. 모두들 우는데 할머니만 웃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