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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수필 가작> 연

무릇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다. 어떤 일이든 첫 경험은 오래 기억의 창고에 갈무리가 되는가 보다. 특히나 그것이 한창 감수성 강할 때 겪은 일이라면.

학창 시절의 어느 늦은 가을날이었던 듯싶다. 그때 무슨 일로 해서인가 교외로 나갔다가, 줄기까지 다 말라 허물어진 연 밭에서 뿌리를 캐내는 낯선 광경을 목격한 뒤로 한동안 깊은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했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긴긴 세월 동안 의식 가운데서 떠나질 않았다. 물 위로 솟은 모습만을 그것의 전부로 알고 있던 시절, 불가(佛家)에서 성화(聖花)로 우러르는 꽃인 연의 뿌리를 캐낸다는 것은 당시 내 정서상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경스런 행위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몇 차례 더 이런 광경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었다. 하지만 그럴 적마다, 처음 맞닥뜨렸던 그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은 많이 가시었다. 대신 한결 담담해진 마음으로 연의 삶과 우리들 인생행로의 상관관계를 곰곰이 헤아려 보는 특별한 계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일을 보는 눈이 세월 따라 시나브로 넓어지고 깊어져 온 까닭에서이리라.






연의 한살이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연만큼 생로병사의 구분이 확연한 꽃이 있을까. 그의 일생은 참으로 극적이다. 모딜리아니의 여인상처럼, 가늘고 긴 목을 뽑아 올리고서 얼 한 점 없는 청순한 자태로 수많은 행인들의 경탄을 자아내다가 어느 순간 허망한 몰골로 사그라지고 마는 그 특유의 생태, 부처의 가르침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법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꽃이 바로 이 연이 아닐까 한다.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대지에 서서히 봄기운이 감돌면 크고 작은 생명체들은 비로소 길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 연의 새봄도 그렇게 열린다. 예서 쏘옥 제서 쏘옥, 꼭 돋아나는 죽순을 닮은 앙증맞은 잎사귀들이 세상 소식의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는 축복과도 같은 태양빛의 세례를 받고서 하루가 다르게 하늘 쪽으로 다투어 키 재기를 하는 것이다.

쏟아지는 뭇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는 연의 여름을 알려주는 전령사이다. 굵은 빗줄기 듣는 날을 골라 한번쯤 연 밭엘 나가 보라. 우중(雨中)의 졸업식장 같은 풍경이 연출되는 특별한 만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잎사귀를 지붕 삼아 도르르 도르르 빗방울을 굴리며 개구리 울음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는 연의 무리들, 그것은 우산을 받쳐 들고서 조용히 축사를 듣고 선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혈기 왕성한 청춘시절을 지나 장년에 가까워 오면, 마치 폭죽이 터지듯 연은 일제히 참아왔던 망울을 터뜨린다. 죽죽 목을 뽑아 올린 줄기에서 환하게 피어난 수만 송이 꽃들의 표정은, 군(무群舞)를 즐기는 홍학의 자태 같고 속진에 물들지 않는 군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고운 얼굴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는 법, 애석하게도 연의 이런 모습은 그리 오래 있어 주질 못한다. 이윽고 서녘하늘로부터 선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평온하던 연 밭에도 어김없이 계절의 변화가 감지된다. 가을을 일러 숙살의 계절이라고 읊은 구양수의 글귀에서처럼, 연도 시절인연이 다하면 이 대자연의 질서 앞에 깊이 고개 숙이며 다음 생을 위해 마침내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리고는 온 연 밭 가득 자신들이 남긴 육신의 형해(形骸)로 뜻 모를 그림문자를 새긴다. 그것은 생사윤회의 무상함을 설하려고 보낸 부처님의 편지이다. 그 편지는 흡사 난수표 같은 것이어서, 마음의 눈으로 읽지 않으면 해독이 불가능한 특수한 상형문자로 되어 있다.

연이 이승에서의 삶과 맞바꾸며 남긴 편지를 그윽이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가섭존자의 미소를 닮은 깨달음이 어렴풋이 떠오를 것도 같다. 세상천지의 형상 가진 존재란 존재는 어느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영원히 생주이멸(生住異滅)을 계속하며 돌고 도는 무상한 것, 이 절대의 가르침을 허허한 늦가을 연 밭에 서서 배운다.

연꽃을 빼놓고서 불교를 말할 수 있을까. 연꽃 하면 으레 불교가 생각나고 불교 하면 먼저 연꽃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연상 작용이리라. 그만큼 연과 불교는 인연이 깊다 하겠다. 어찌하여 세상의 무수한 초화들 가운데 하필이면 연꽃이 불교의 표상물이 되었을까.

연은 기묘하게도 인연과 동의어 관계에 있다. 불교의 인연법을 안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닐 터이지만, 어쨌든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사실만은 이 연을 통해 어림으로나마 깨달을 것도 같다. 연은 본래 굴지성을 지닌 줄기식물이기에, 땅속 깊이 뻗어나가 전체가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음에도 물 위로 솟아날 때는 제각기 다른 개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수면 위에 떠 있는 연을 보았다고 해서 연의 실체를 다 알았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두고 연의 이치를 제대로 깨친 이라고 말할 순 없으리라. 정작 연의 귀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 아래 세계에 있다. 땅속으로 뻗은 뿌리의 생김생김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질긴 인연에 다름 아니다. 이 인연들이 얽히고설켜 캄캄한 진흙탕을 뚫고서 예서 불쑥 제서 불쑥 결 고운 꽃송이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따로인 듯 하나다. 물 위에 돋아난 줄기들은 얼핏 홀로 선 개체들로 보이지만, 땅속을 헤집고 들어가면 뿌리를 같이하는 이형동체(異形同體)를 이루고 있다.

수행자들이 온전히 생애를 걸고 목마르게 찾아 헤매는 진여의 세계도, 그것이 연의 뿌리처럼 쉽사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지난(至難)한 고행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가 인연법의 오묘함을 반신반의하는 것도 따지고 들면 그 까닭은 결국 마찬가지이리라. 마치 연의 생태에서처럼, 근본은 같은데 드러난 개체는 따로 이다 보니, 사람들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 현시된 상황에만 집착할 뿐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쉬 믿으려 들질 아니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엄연한 진리일지라도.

연이 이처럼 겉으론 딴 몸인 듯해도 그 뿌리는 마침내 하나이듯이, 인연법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들 각자도 궁극엔 너와 내가 한 몸인 이형동체의 존재들이다. 따라서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이란 동체대비(同體大悲)가 영원불변의 절대 진리란 사실이 자명해진다.

중국 송나라의 문장가 주 염계 선생은, 진흙탕을 뚫고 나왔으되 더러움에 물들지 아니하고,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먼 데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는 까닭에 연을 사랑한다고 했다. 물론 향기가 좋고 자태가 고와서이기도 하려니와, 진실로 연이 사랑스러운 것은 그 생태적 특성이 보여주는 현묘한 상징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연을 보고서 인연의 이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마음의 눈이 밝지 못한 무딘 감각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을 성싶다. 물 밑에 잠긴 연당의 진흙 뻘밭을 파헤치는 광경을 눈여겨 지켜보라. 얼기설기하게 연달은 수많은 뿌리의 매듭들, 만유존재의 인연은 필시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매듭의 모습으로 얽히고설켜 있으리라. 그 무량한 생명들이 나고 꺼지고 나고 꺼지고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는 동안, 서로의 육신과 육신이 얼마나 실타래처럼 복잡 미묘하게 섞갈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리하여 우리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하찮은 나뭇잎 하나며 풀 한 포기, 혹은 어린 사슴의 눈빛에서도 내 존재의 흔적이 어리비치고 있음을 본다.

한 송이 한 송이의 연꽃은 바로 우리들 실존자의 모습이다. 그런 까닭에, 설사 불제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각자 마음의 연못에다 연 한 그루씩을 심어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퍽 의미 깊은 일일 성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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