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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칼럼> 지금쯤 달 하나 띄우고 붉게 타오를…

유난히 태양이 나를 달뜨게 했던 지난여름 나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내 안에 야생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내 몸은 늘 뜨거웠고 현재에 안주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의 조상은 은빛 갈기가 눈부신 늑대였을 것이다. 하늘을 보면 늘 이마가 시렸고 들판을 보면 심장이 뛰었다. 흐르는 강물 소리만 들어도 갈기가 곤두섰다. 푸른 풍경을 찾아가야 하는, 그것은 본능이었다.

숨 가쁘게 달렸다. 죽창과 황토의 땅 전라도를 지나 경상의 끝으로 갔다. 끝에서부터 역류하여 흙속에 깃든 살 냄새를 맡고 싶었다. 이것을 풍경과의 수상한 연애라 해도 좋다. 남쪽으로 이어진 긴 실핏줄 같은 길을 질주하며 싱싱한 바람으로 배를 채웠다. 이제 내 여름의 항로는 통영에서부터이다. 통영에서 하룻밤을 자고 섬진강으로 풍경을 몰면 된다.

통영은 파닥거리는 도시이다. 거기에는 어떤 간절한 목숨이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중앙시장에서 애틋한 몸부림을 본다. 닥지닥지 늘어선 활어노점상이 도마와 함께 뒤척거린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간이횟집에서 참돔과 광어가 내 앞에서 옷을 벗는 시간은 짧았다. 하얀 살결이 일회용 접시에 담겨 나오고, 소주를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 목숨의 전율. 나는 몇 잔의 술에 취해 어둠을 맞는다. 어둠이 내 안에 가득히 퍼지면서 통영이 비로소 내 안에 들어온다.

어둠이 걷히면 새벽이 밀물 친다. 일출을 옆구리에 두고 나는 통영을 떠나야 한다.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으로, 강변의 모래와 벚나무, 수 천 개의 눈동자로 반짝이는 물들이 집전하는 세례식을 보아야 한다. 하동에서 상형문자처럼 늘어선 식당에 들어가 재첩 한 사발을 받아 모신다. 숟가락 위에 올려진 까만 재첩의 껍데기에서 세월의 물살을 읽는다. 연흔! 수많은 물살이 만들어낸 삶의 내력. 손금이나 이마의 주름처럼 선연한 삶의 자국을 해독해야만 삶의 단서가 잡히고 시간의 문이 열린다.

달 밝은 밤 두꺼비가 울음을 토하는 섬진나루. 섬진강이 키워내는 모든 것은 그 젖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온순하고 순종적이다. 살짝 기미 낀 얼굴로 아이 하나를 업은, 박수근 화백이 그려낸 아낙 같은 강. 가난과 아픔 정도는 장아찌 담듯 묻어버린, 그 뒤란의 풍경이 섬진강이다.

나는 세상을 짐승처럼 떠돌았지만 강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 세상 수많은 강들과 연애를 시도했지만 살갑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여, 섬진강을 보기 전에 강을 보았다 하지 말라. 섬진강에서 자식을 낳아보지 못했거든 어머니의 품을 얘기하지 말라. 삶을 통째 보듬어야 강이 아닌가.

대부분 인간은 작은 강 하나씩 소실처럼 끌어안고 산다. 그래서 늘 찰박거리고 희희낙락하지만 섬진강은 요염하지도 호들갑스럽지도 않다. 그저 도도하고 오연하고 숙연하다. 세상 떠들썩함에 귀를 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번잡한 모든 소리가 여기에서 끝난다. 언어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저 침묵으로 침묵의 위를 흐르는 강. 시간도 여기에서 소멸한다. 그저 흐르고 흐르다가 허기지면 유연히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사람을 배불리는, 그게 섬진강이다.

화개를 지날 무렵 강변으로 내려간다. 배 한 척이 있고, 두 사람이 구릿빛 어깨를 드러낸 채 그물을 만지고 있다. "재첩 좀 잡히나요?" 묻자 사내 하나가 담배 연기를 풀며 그저 살짝 웃는다. 섬진강을 닮아 웃음조차 물결로 찰랑인다. 그의 몸엔 섬진강의 유전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섬진강에 사는 모든 생명들은 같은 계보이다. 두 사람의 어깨에서도 재첩에서 보았던 갈색의 문양이 눈에 띈다. 어쩌면 그들 옆구리엔 퇴화된 지느러미가 있으리라.

내가 다시 산다면 섬진강변 어디쯤에 막걸리 몇 통 받아놓고 살고 싶다. 심심하면 강물에 발 담그고 섬진강 시인을 만나 풀꽃 냄새나는 얘기를 듣고 싶다. 세상 얘길랑 물고기 밑밥으로 주고 순창 산골짝부터 흐르고 흘러 통영에 이르고 싶다.

어쩌면 지금쯤 달 하나 띄우고 붉게 타오를,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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