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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교사론> ①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이제 나무는 회초리를 건네지 않는다. 세상이 회초리를 버렸으므로….”

숲과 계곡을 물들이고 그리움을 감염시켰던 단풍, 단풍은 이제 낙엽이 되어 뿌리 옆에 누웠다. 바스락거림도 없이 차분한 부피로 햇볕을 뜸들이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정에는 많은 나무들이 산다. 공지 대부분을 나무에게 임대해 준 것처럼 곳곳에 나무들이 거처한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새들이 놀다 가고, 어린 꽃들과 곤충이 어울려 작은 우주를 형성한다. 그들이 도란거릴 땐 바람소리도 난다. 나무와 풀들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 저희끼리 뭔가가 우스운 모양이다.

그 중, 유난히 키 큰 나무들이 거주하는 동산, 그곳엔 커다란 백합나무와 단풍, 은행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맡기고 산다. 서로가 다툰 적 없는 나무들, 너무 다정하여 가을 내내 노랗고 붉은 바디페인팅으로 카니발을 즐기던 그들. 그 발치엔 낡은 벤치가 머물러 있다. 늘 푸른 꿈에 젖어있어 시집이라도 한 권 놓아두고 싶은 벤치. 하늘 홀로 깊어가고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그곳.

지금까지 나는 많은 시간을 나무와 함께 보냈다. 야트막한 산의 오솔길을 거닐거나 험준한 산을 오를 때, 나무는 뿌리를 내어주거나 손을 내밀었다. 선뜻 자신을 내주는 나무들. 나무는 계산하지 않는다. 설령 가지가 잘려 도끼자루가 된다 하더라도 절망하지 않는다. 우듬지가 잘려 아궁이로 간다 해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여름 내내 애지중지하던 도토리들을 지상 양식으로 남겨놓고 장엄하게 레퀴엠을 듣는, 나무는 어쩌면 성스러운 마지막 종족이다.

나는 수업하다 가끔씩 창밖의 나무와 눈이 마주치곤 한다. 학생들에게 노자와 장자를 얘기하는 나를 문득 부끄럽게 만드는 순간이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송찬호의 시를 이야기하다가 정작 시가 창문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창밖에 사는 나무들은 어수룩한 내 강의를 까치발까지 딛고 듣는데, 아이들의 귀와 눈은 다른 세상에 있다.

봄이면 민들레가 탄흔처럼 터지는데도 노란 생명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아이들, 여우비가 살랑살랑 꼬리를 쳐도 두고 온 우산을 탓하는 아이들, 가을 낙엽이 옷깃을 스쳐도 그저 지르밟고 가는 낯선 이방의 아이들. 붉은 단풍잎에 ‘쌤, 사랑해요’라고 글씨를 써서 서로 책갈피 선물로 주던 손길은 이제 없다. 그저 MP3로 귀를 막고, 게임기와 스마트폰에 마음을 빼앗긴 채 푸른 미래를 방전한다.

사색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치마를 줄여 입고 화장을 하는 아이들, 담배와 술에 익숙하여 부모나 선생을 거추장스러워하는 아이들. 깊은 산 깊은 계곡에 싱싱한 나무가 자라는 것인데 이젠 깊은 산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험준한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찾는 이도 없다. 갈수록 말라가는 세상에 갈증 느끼며 모두 사막화되어 간다.

관능적인 악기 오보에. 그 음색에 홀리는 이유가 있다. 클라리넷처럼 그것이 목관악기이기 때문이다. 나이테를 더할수록 그리운 목관악기.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희망을 연주하는 ‘오보에’이어야 한다. 바른 음계를 짚어주고 가슴을 적셔주는, 뿌리 깊은 소리이어야 한다.

어제는 동산을 지나다 보았다. 일정한 간격 속에 머무는 나무의 주거방식.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상대방 가지에 겹치지 아니하고자 반대편으로 벋고 있었다. 상대를 배려하여 스스로의 가지를 쳐내는 나무들. 아무런 ‘인권조례’ 없이 스스로 절제하고 희생하며 주어진 삶을 최선으로 피워내는 그들. 그래서 그 밑에 자라는 잡초조차 곧고 푸르게 자라는 것을 보았다.

예전 같으면 자신의 몸 한 마디 툭 쳐내어 사람에게 회초리로 건네던 나무, 이제 나무는 회초리를 건네지 않는다. 세상이 회초리를 버렸으므로. 그래서 참 자유로운 교실. 나는 거친 아이들의 등짝에 말줄임표를 찍으며 창밖 나무들을 본다. 어쩌면 내 전생이 수액 풍부한 싸리나무였을까. 새삼 교편이란 어휘가 그립다.

▶ 김쌤의 다시 쓰는 교사론은: 꽃으로 가슴을 두드리련다=언제는 안 그랬을까만 오늘의 교육을 나는 혼돈으로 규정하고 싶다. 교사는 교사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방향성이 없다. 한 마디로 막 간다. 그리하여 학교 현장은 삭막하다. 안전진단으로 말하면 D등급이다. 이제 교직은 천직이 아닌 수단이다. 젊은 교사는 늙은이처럼 행세하고 원로교사는 천덕꾸러기이다. 안일무사하며 점수 따기 급급하고 내 멋대로 사는 선생들, 말초적 감각을 좇는 아이와 먹고 살기 바쁜 부모, 그리고 전문이 아닌 교육전문가.

교사 자격증을 땄다고 선생이 아니다. “선생님, 저 이담에 선생님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래요.”라는 말을 먹으며 선생이 되는 것일진대.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하다. 이제 나는 철학이 실종된 무례한 교육과 오만한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려 한다.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조망하며, 차가운 가슴엔 군불을 지피고자 한다. 금속성 언어보다 꽃과 풀들의 언어로 여러분의 가슴을 벨 것이다. 서정의 힘은 강하다. 나의 언어들이 불모의 현장에서 선생님들의 따뜻한 눈길로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교육은 우리의 마지막 카드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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