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릉~’
아직 붐한 날인 줄로 아셨는지 거미가 촉수로 더듬듯 짧게 한 번만 보냈다. 무얼 핑계 삼더라도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곤한 잠을 깨울 새라 안쓰러워하는 엄마의 고민이 벨 소리에 역력히 묻어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어머니가 일찍 전화를 넣으신 것이다. 잠 들 때까지 자식 생각하다가 밤새도록 가슴에 품고 눈 뜨면 다시 생각하는 존재가 엄만 것 같다. 이적지 살아오시며 자식들에게 기운을 다 내어 준 어머니한테 아직도 남은 게 있을까? 안 골목에 사는 고향의 누나가 들어오더니 안고 온 보자기를 거실 바닥에다 내려놓는다. 이리로 오는 차편에 어머니가 끝물 감을 부친 것이다. 벽시계의 분침이 아래로 처지며 나를 출근길로 밀어낸다. 홍시 담은 함지박을 급하게 싸느라 자꾸 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까지 같이 쌌을 그 보자기를 나는 풀어볼 시간이 없어 그냥 나갔다.
고향집을 야트막하게 두른 돌담을 사립문까지 따라오면 키가 큰 돌감나무와 과육이 꾀죄죄한 고욤나무를 만난다. 잘아빠진 돌감이나 고욤은 씨 치레라서 늦가을에 까치밥으로나 남을 뿐 별로 실속이 없다. 타작마당에 요긴하게 새참을 하도록 건넌방 옆에 증조할아버지가 반시나무를 심었다.
납작감은 떫지 않은 감으로 동네에 퍼져 있다. 다스운 온상 속의 열매라면 속이 덜 익어 떫겠지만 이리저리 치인 납작감은 떫을 새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납작감은 가을을 한두 달 더 얹어 익는다. 마을 뒤에는 ‘소리못’이란 이름을 가진 저수지가 있다. 둘레를 다 돌면 해동갑한다고 못지기가 자랑하는 못이다. 여러 계곡에서 몰려온 바람은 폭과 길이가 기다란 못 위에서 회오리바람을 일구어 아랫마을로 불어댄다. 우리 집은 맨 뒷집이어서 이 못 바람을 안고 산다. 농사지을 물이 가득 실리면 저수지는 더욱 득의양양하다. 옛날 아들 많은 할머니가 딸만 낳은 며느리 앞에 유세 떨던 것처럼 못 바람은 언제나 떵떵거렸다. 산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정없이 수면 위를 흘기고는 뒷문 문고리를 덜그럭거리며 감나무로 몰아친다. 못 바람으로 가을이 유난히 빨리 느껴져 긴 추위 속에 껍질이 트며 납작감은 익어갔다.
납작감이 떫지 않은 연유 가운데는 우리 집 할머니도 빼놓을 수 없다. 다사스런 성미에 귀까지 먹은 할머니는 하루 종일 입으로 사신다. 손자에게 보리밥 한 톨이라도 이에 걸리면 종종거리며 담뱃대를 들고 감나무 밑에 둔 평상으로 간다. 담뱃대에 봉초를 꾹꾹 눌러 채우고는 성냥불도 붙이려 안 하고 연해 빈 입만 달싹이신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모네 아이들이 사립문에 얼찐거리면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져 성냥불을 붙여 볼이 합죽해지도록 빨고 거푸 연기를 뱉어낸다. 상한 마음이 밴 연기는 납작감에 감긴다. 납작감은 할머니의 분을 삭이며 속이 부드러워졌다. 세 철을 겪어 온 납작감은 풋감 때부터 단련이 되어 군속한 환경도 잘 견뎌내는 이력이 생겼다. 비를 추적추적 맞아도 무른 속은 군소리가 없다. 못 바람에 껍질은 거칠어져도 속살은 달큼하게 익어갔다.
어머니도 그랬다. 가을이 훨씬 길었던 우리 집 납작감처럼 어머니의 시집살이도 늦가을까지 남아 된서리맞은 감과 같았다. 어머니는 딸만 둘 낳고 상처한 아버지와 처녀 결혼을 했다. 찔레꽃이 장가드는 곳에 석류꽃이 상객으로 간다는 노랫말처럼 아버지는 대를 이으려고 한 세대나 어린 어머니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생산력이 쾌해 보이는 새 며느리를 보며 흐뭇한 기분으로 긴 수염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며느리의 불룩한 배만 쳐다보고 있으면 굶어도 든든할 할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누나와 할머니의 태도는 아주 달랐다. 귀가 먹은 대신에 눈이 초롱같은 할머니는 입으로 정기가 쏠렸다. 보이는 것마다 참견이다. 생전에 손때 묻었던 가재도구들이 새 엄마 손에 익숙해지는 걸 보면 누나의 어머니에 대한 미어지는 그리움은 장미 가시 같은 질투로 변했을 것이다. 누나는 어머니가 이모에게 된장 한 사발 주는 것도 할머니에게 다 일러바쳤다. 누나는 할머니를 지렛대로 사정없이 어머니를 헐뜯었다. 모진 가난이 아버지를 만난 고리였지만 친정이 여자 힘의 원천인 것 같다.
한번은 밥을 먹다가 할머니가 젓가락을 빼앗고 밥그릇을 엎은 적도 있었다. 갓 시집온 젊은 것은 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어야 하고 여자가 젓가락질하면 본때 없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여남은 살 때부터 노년에 접어들던 아버지는 몸 움직이는 걸 귀찮아 하셨다. 멍석에 늘어놓은 보리가 떠내려가도 구들장을 안고 두루마기 제문을 읽으시는 아버지였다. 상노인 두 분과 집 밖을 도는 누나들, 일할 때는 남이고 먹을 때만 식구였다. 잔심부름 하나 만만하게 시킬 자리 없는 어머니는 형과 나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안 걸려들려고 학교를 마치면 친구 집을 맴돌다가 시간을 다 때우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은 시키지 않고 쌀밥만 주던 할머니가 나는 좋았다. 어머니를 나무라 주는 할머니는 우리 편이었다.
가난을 밥풀 떼먹듯 했던 외삼촌과 이모들은 양배추 속처럼 꽉꽉 껴안는 우애뿐이었다. 이모네가 우리 집 논마지기라도 얻어 부치려고 이웃에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에겐 그것도 짐이었다. 이모네 아이들이 양재기에 쌀밥을 폭폭 축내면 할머니는 궁둥이를 위아래로 들썩거리시며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감나무 밑이 할머니의 해우소라면 빨래터는 어머니의 해우소이다. 속을 털어낼 곳이라곤 이모밖에 없다. 이웃에 두고도 늘 허기졌던 자매끼리 대화를 빨래터에서 속까지 헹궈 흐르는 물에 쏟아낸다. 어머니가 마음 바닥까지 훑어내면 이모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빨래방망이를 더 세게 두드린다.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빨래만 빠는 것이 아니라 갑갑한 마음도 함께 치대서 훌훌 흔들었다.
할머니는 자매가 냇가에 마주 앉아 빨래하는 모습도 달갑지 않았다. 빨래 그릇 속에 쌀 봉지를 감춰 몰래 이모에게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할머니로부터 늘 의심의 족쇄를 차고 살았다.
서운한 마음을 머리에 꿰고 살았지만 어머니는 누구를 탓하는 법이 없었다. 물 흐르듯 순리에 따르며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어머니의 고충은 대단한 데 있었다기보다 아무도 그 속을 알아주지 않음에 있었을지 모른다. 조석으로는 대가족으로 북적댔지만 집안일과 농사일 가운데서는 언제나 외로운 섬이었으니까.
어느덧 할머니의 노구를 닮은 어머니는 이모와 마주 앉으면 옛일을 넋두리처럼 풀어내신다.
‘두 시어른에 영감님까지 삼년상을 치르고 딸 둘을 추성시킨 데다 내가 낳은 것들까지 끈 이어 주고 나니 삭신이 다 무지러졌다.’고
일을 마치고 들어오자 아내가 홍시 보자기를 식탁 위로 들고 왔다. 어머니의 온기가 배어 있을 보자기의 매듭을 조심스레 풀고 있다. 용하게도 오디오에선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보고파진다.’는 나훈아의 노래가 흐른다. 아내는 껍질이 트고 금 간 홍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한입 베어 물고는 달다고 야단이다. 간간이 감 씨를 식탁 위에 뱉어내고 있다. 가을이 깊을수록 속살은 맛깔스럽게 익었는데 씨는 이리도 여물어졌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속살이 흐물흐물하게 연해질수록 씨는 수분이 빠지고 딱딱하게 굳었다. 감 씨에 저장되었던 양분을 시나브로 과육에게 내주고 스스로 말라 버린 것이다. 심장이 뜨뜻해왔다. 창틈으로 째어든 비로 베란다에 놓인 제라늄 화초에 맺혔던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어머니도 홍시처럼 넉넉하고 부드러웠지만 첩첩물길 가슴속은 권속들에게 기운을 다 빼앗기고 쇠약한 감 씨 같은 응어리로 맺혔을 것이다. 아마 어머니는 가슴에다 대장간을 하나 차리셨던 것 같다. 못 바람을 견디고 숙성된 홍시처럼 늘 한 발 뒤에서 속을 발효시킨 어머니, 어머니의 가슴 깊은 곳에 감 씨처럼 여문 못이 박혔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 못이야말로 가정을 일궈낸 자양분이었으리라. 식탁 모서리에 뱉은 자갈색 감 씨가 벽에 걸린 어머니 사진 속의 저승꽃과 겹쳐져 보임은 왜일까?
어머니의 쿨렁거리는 기침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자애로운 목소리 구만리 밑에 까맣게 탄 응어리는 아무도 모르게 엄마 가슴에 묻혀 있다. 아내가 뱉어 놓은 감 씨는 아무리 봐도 어머니의 가슴에서 파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