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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savanna) 교실

“생존은 투쟁이다. 이러한 개념은 야생과 문명을 가리지 않는다. 다시 교실 안을 바라보면 아이들은 하나 둘 무방비로 졸고 있다. 치타와 사자가 풀 섶에 웅크려 있는데도 생각이 없다. 어미가 젖을 물리 않으면 허기져버릴 아이들. 선생이 앞서지 않으면 푸르른 초원도 찾지 못할 아이들. 사바나의 교실, 그들의 무지갯빛 꿈 어디쯤 나는 서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캔버스이다. 흰색과 빨강과 노랑 그리고 초록의 물감이면 충분하다. 얼마 전까지 나무들이 몸을 쥐어짜 하양, 빨강, 노랑으로 세상을 칠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 위에 초록을 덧칠하고 있다. 어쩌면 생명의 바탕이 초록인 듯 지상의 모든 것은 연둣빛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교실의 아이들도 여린 새싹처럼 곱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 푸른 하늘 아래 아이들의 눈빛은 초식동물의 눈들을 닮았다. 한동안 아이들은 사바나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그리고 머잖아 어미를 닮아 튼튼한 발굽과 뿔을 지니고 초원을 달릴 것이다.

나는 그러한 어린 생명들 앞에서 푸른 교과서를 펼치고 각주를 달게 한다. 푸르게 돋아나는 생명의 시들을 판서하며 아이들의 이마를 매만진다. 아이들은 맑은 눈엔 꽃망울이 흔들리고 가슴에 풀씨 같은 상형문자가 자란다. 하얀 민무늬 노트가 그들이 새긴 부호들로 말미암아 빗살무늬가 되고 채문토기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 손끝에서만 가능한, 문명 이전의 세계를 만나는 순간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갇힌 동물처럼 뛰쳐나갈 것 같은. 성덕대왕신종에 갇힌 선녀들이 막 소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순간이다.

진실로 공부는 아름다운 노작이며 신의 축복이다. 세상에 무수한 입자로 가득 찬 지식들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나무들조차 제 몸에 꽃을 달고 세상을 밝히듯 모든 생명 또한 저마다의 스펙트럼으로 우주를 밝힌다. 제단에 올려진 예단처럼 찬란한 모자이크로 신과 하나 되는 것이 생명의 궁극적 카니발인 것이다. 감나무는 감나무대로 감꽃을 피우고 민들레는 민들레대로 노란 숨결을 뿜으며 생을 찬미하는 것, 그러다가 감나무는 감나무대로 붉은 홍시로, 민들레는 순백의 솜털로 하늘을 간질이는 것, 이것이 생명의 퍼포먼스 아닌가.

아, 이제 막 깨어나 푸른 풀밭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세상을 읽는 순하디순한 생명들. 이 순박한 생명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린 생명들에게 어떤 젖을 먹일 것이며 어떤 질주의 본능을 가르쳐 줄 것인가. 지상에 돋아나는 푸른 신비는 어떻게 설명해 주며 날아다니는 것들의 생물학적 계보는 또 어떻게 설명해 줄 것인가. 점성술과 신들의 이야기는 어느 단락에서 풀어내야 할 것인가.

우선 종족의 신화를 읽혀야 한다. 그리고 톰슨가젤(Thomson's Gazelle)의 언어와 누우(Wildebeest)의 언어, 혹멧돼지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정신을 맑게 하는 풀과 유해한 풀의 목록을 알려주어야 하고 육식성 동물의 인상착의도 알려주어야 한다. 햇무리의 상징과 저녁놀의 비유도 이해시키고 마지막 우기를 견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실존철학도 가르쳐야 한다.

초원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 어디를 가도 수목이 우거져 호수 가득 하늘이 담겨 있다. 보라풀빛앵무새가 노래하고 쇠똥구리들이 경단을 굴리는 평원. 그저 무한한 자유와 사랑만이 권태로울 정도로 펼쳐진 낙원. 어린 것들의 눈에 비친 열대 우림은 더러 멋진 오프닝 시퀀스일지 모른다. 하지만 머잖아 악어가 사는 마라 강을 건너야 하고 사자와 하이에나의 영토를 가로질러 살아남는 자만이 죽은 자를 묻어야 하는 아픔에 대해서는 모른다. 어떠한 정보도 없이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다.

아무래도 무참한 그들의 삶. 되짚어보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색은 세 가지로 충분하다. 황토색과 푸른색 그리고 붉은색. 40℃를 넘는 땅에서 풀을 찾다가 맹수의 이빨에 찢기는 그들. 그들의 최후는 항상 붉다. 그래서 임팔라(impala) 같은 초식 동물은 우기가 되고 풀이 자라면 1, 2월에 집중적으로 출산한다. 희생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한 슬픈 그들의 전략.

정말이지 생존은 투쟁이다. 이러한 개념은 야생과 문명을 가리지 않는다. 다시 교실 안을 바라보면 아이들은 하나 둘 무방비로 졸고 있다. 치타와 사자가 풀 섶에 웅크려 있는데도 생각이 없다. 야생의 사자가 뛰쳐나오는 찰나 순간적인 가속도를 내지 못할 아이들. 어미가 젖을 물리지 않으면 허기져버릴 아이들. 선생이 앞서지 않으면 푸르른 초원도 찾지 못할 아이들! 사바나의 교실, 그들의 무지갯빛 꿈 어디쯤 나는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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