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다’는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 배우게 하다는 말이다. ‘가르키다’는 '가르치다'의 잘못된 표현이다. 예를 들면 ‘동생을 가르켰다’가 아니라 ‘동생을 가르쳤다’가 맞는 말이다. ‘가르치는’ 일에는 언제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한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이나 가치관을 ‘가르치는’ 것이다. 특정 내용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 거기에 담겨진 철학과 신념, 지식을 얻는 동안 고뇌했던 체험적 열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받는 감동은 ‘가르침의 기교’에서 오지 않고 가르침에 임하는 스승의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가르침은 기법과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열정, 자세와 태도의 문제다. 제자가 원하는 것은 전달하는 메시지보다 메시지에 대한 스승의 관점과 철학, 체험적 스토리와 열정이다.
‘가르치다’라는 말과 혼동될 수 있는 말이 바로 ‘가리키다’이다. ‘가리키다’는 손가락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말이다. 스승은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므로 ‘가르침’은 곧 ‘가리킴’이다. ‘가르침’은 곧 ‘가리킴’이기 때문에 잘못 ‘가르친다’는 것은 곧 방향을 잘못 ‘가리킨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승이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실수는 제자들이 나아가야 될 방향을 잘못 ‘가리키는’ 것이다.
'스승이 있는 곳에 도(道)가 있고 도가 있는 곳에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길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는 것이다. 스승은 길의 방향을 가리키는 사람이고 제자는 그 길에 도달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서 발견하는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길을 찾고 길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사람은 자신이다. 깨달을 ‘각’(覺)자를 보면 ‘배워서’(學) ‘본다’(見)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가르침’을 받고 방향에 대한 ‘가리킴’을 받으려면 먼저 배워야 큰 깨달음이 있다는 의미다. 배우지 않고 문제의식이 없는 제자에게 스승이 아무리 가르치거나 가리켜도 가르침과 가리킴의 본질과 내용과 방법을 깨닫기 어렵다.
위대한 스승은 제자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너무 많은 가르침은 오히려 제자의 유연한 생각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다. 제자가 갖고 있는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마중물과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제자는 마침내 꿈틀거리는 욕망의 물줄기를 찾을 수 있다. 진정한 가리킴은 질문을 던지는 일에서 비롯된다. 질문도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 과감하게 미지의 세계로 떠나도록 유도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나 단답형 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오히려 제자들의 지적 탐험과정을 방해할 수 있다. 스승이 던지는 질문의 성격과 방향이 제자가 얻을 답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제자가 어제와 다른 답을 만나게 하려면 어제와 다른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도록 안내해주어야 한다.
한편 ‘그르치다’는 무언가를 잘못해 일을 그릇되게 한다는 의미다. ‘그르치다’는 한자로 '誤(오)'라고 쓴다. 가르치면 긍정적으로 사람이 바뀌지만 그르치면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멍청한 의사 한 명은 환자 한 명을 죽일 수 있지만, 멍청한 교사 한 명은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스승이 ‘가리키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방향을 잘못 가리키면 내용을 잘못 ‘가르치는’ 것보다 그 파급효과가 훨씬 막대하다.
이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일방적 가르침은 정답이 존재할 때 가능한 일이다. 갈수록 문제는 복잡해지고 하나의 정답 보다는 여러 가지 현답(賢答)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스승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함께 헤매는 것이다. 다만 스승은 제자보다 답이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헤맸던 경험이 많을 뿐이다. 스승은 체험적 깨달음을 통해 제자에게 다양한 현답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제자에게 질문을 던져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해보는 길로 안내해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