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굽이굽이 흘러서 바다로 간다. 바다로 흘러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 비로 내려온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이유는 바다가 다 받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다가 이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 줄 수 있는 원동력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내려감은 올라감이다.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아래로 두려움 없이 내려가는 용기도 필요하다. 폭포는 자신이 아래로 떨어질 시점에서 고민하거나 멈칫거리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던진다. 아래로 떨어진 물은 다시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물을 받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계적으로 물을 퍼 올리는 서양의 분수 밖에 없다. 폭포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지지만 분수는 기계적 힘에 의해 강제로 올라갔다가 추락한다.
학생들의 아픔을 감지하려면 학생들에게 내려가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위에서 ‘관망’하지 않고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내려가서 ‘관찰’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감동적인 수업을 하려면 학생들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학생들의 마음을 읽으려면 그들이 기대하는 요구수준을 넘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자극해야 한다. 결국 가르치는 사람은 학습자의 마음을 훔치는 ‘마음 도둑’이 돼야 한다. ‘마음 도둑’이 되려면 학생들의 세계로 내려가서 그들과 대화하고 귀를 기울여 경청해봐야 한다. 학생들이 있는 현장에서 현실을 읽어낼 수 있고,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학생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식은 책에도 있지만 현장에서 건져 올린 지식이야말로 현실적합하고 시의적절한 지식이다.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을 흔들어야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뿌리의 깊이와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바닥은 신념이다. 신념을 흔들면 사람이 바뀐다.
싸움소는 자신의 머리를 최대한 낮추고 상대 소에게 싸움을 건다. 잠시 머리를 들었다가는 순식간에 공격을 당해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씨름 선수도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고 상대방으로 파고들어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자신의 자세와 태도를 낮추는 것이 결국 이기는 비결이다. 내가 먼저 자세를 낮추고 상대를 높여주는 것은 결국 나를 높이는 지름길인 셈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활동이다. 학습자를 높여주면 자신은 저절로 올라갈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와 높이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초보자의 마음이자 겸손한 마음이다. 한 학기를 시작하는 첫 수업, 일주일을 시작하는 첫 강의에 임하는 초심이 바로 가르침의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자세다. 겸손한 마음은 실력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이다. 겸손함은 실력에서 나온다.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정보와 지식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나아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은 정보와 지식에 담겨진 의미와 철학, 열정과 혼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인생을 먼저 가본 사람이 후배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적 스토리와 여기에 담겨진 자신의 철학과 열정을 교감하는 과정이 바로 교수-학습과정이다. 따라서 가르침의 여정은 배우는 여정의 안내자이다. 역으로 가르침의 과정은 배움의 과정이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배우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새로운 관점과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방해하는 기존 지식을 버려야 한다. 기존의 지식, 고정관념이나 통념, 타성이나 낡은 습관 등을 버려야 새로운 지식과 생각이 움틀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이 생긴다. '버리는 학습(unlearning)'은 배우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도 필요하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 한 때 즐거움과 기쁨을 주었던 성공도 필요에 따라서는 버려야 한다. 예전과는 상황과 조건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버리는 학습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철저한 버림이 곧 확실한 얻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