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다음과 같은 4지 선다형 문제를 냈다고 가정해보자. 다음 네 가지 항목 중에서 세 가지는 공통된 특성이 있어서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데 나머지 하나는 그 세 가지에 포함시킬 수 없는 항목이 있다. 무엇일까? ①배추, ②소나무, ③칼, ④고추.
교과서적인 정답은 물론 ③칼이다. 왜냐하면 배추, 소나무, 고추는 생물이고 칼은 무생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교육은 기존의 범주체계를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칼이라는 정답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어떤 학생은 위 문제의 정답을 ②소나무라고 답했다. 그 이유는 배추, 칼, 고추는 김치 담그는데 필요한 항목이고 소나무는 김치 담그는 것과 관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방법에 익숙하다. 예를 들면 1.5 + 5 = ( )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6.5라는 답을 찾는 것이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 ) + ( ) = 6.5라고 했을 때, 더 해서 6.5가 될 가능성은 부지기수다. 정답을 찾는 문제는 답이 하나지만, 문제를 찾는 문제는 답이 여러 개다.
오늘날 전 세계 유수기업의 CEO, 할리우드의 영화감독,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압도적인 비율로 많은 민족은 유태인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어릴 적부터 질문중심 교육을 받아온 데 있다. 유태인의 교육은 “여기 답이 있다. 이 답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는 사람은?”이라고 물어보는 교육이다.
우리는 사전에 연습한 기계적 반응방법으로 보다 빨리 하나 밖에 없는 정답을 찾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그렇다보니 질문 자체를 의심해보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질문이 던져지면 곧바로 달려가서 답을 찾기보다 질문의 성격과 방향과 본질과 가치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질문에 갇혀서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질문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우리를 구속하기도 한다. 타인이 던진 질문에 나를 구속할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 던진 질문의 올가미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던지고 있는 질문이 나를 구속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도하는 질문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교육도 이제는 기성세대가 편집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참여와 발견 중심의 교육으로 재편돼야 한다. 누군가가 정답을 이미 갖고 있는 상태에서 정답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수많은 학생들은 그 정답을 보다 빠르게 찾아 나서도록 가르치는 직선형 교육만 받은 사람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실제 삶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
교육의 핵심에는 언제나 끊임없는 질문을 통한 학습자의 시행착오를 토대로 한 체험적 깨달음이 내재돼 있어야 한다. 내가 고생하면서 찾은 답이라야 내 삶과 직결될 수 있다.
수영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수영을 잘 할 수는 없다. 수영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과 수영을 실제로 하는 능력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영하는 방법은 수영장에서 시행착오 끝에 물도 먹어보고 헤매면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잔잔한 개울가에서 시작한 수영을 또 다른 상황에서도 시도하면서 좀 더 깊은 곳으로 옮겨가면 마침내 파도치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수영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게 지금 하는 공부가 재미없는 이유는 왜 공부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재능과 개성은 누군가가 대신 찾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직접 이런저런 시도와 모색, 실험과 탐색, 다양한 놀이체험을 해 보면서 아이들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욕망의 물줄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세상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주고, 시행착오를 통해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와 무대를 제공해줘야 하는 것이다.
길을 가다 넘어질 수 있다. 항상 다니던 길에 의문을 갖고 익숙한 길 밖의 길을 가다 보면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질문과 시행착오의 체험만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