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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⑨ 앎은 상처다?

새로운 것을 알면 알수록 기존의 앎이 허술하거나 부실한 앎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앎은 앓음인 것이다. 기존의 앎에 심한 생채기를 내는 과정이다.

앎이 깊어질수록 기존의 앎에 상처가 생긴다. 새롭게 알아갈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져 아픔의 강도는 심해진다. 그 아픔이 두렵다면 앎의 행로를 멈춰야 한다. 그런데 앎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숱한 상처의 흔적에 기억과 추억이 새겨지고 아름다운 앎의 무늬로 재탄생한다.

아픔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아름다움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앓음다움'과 '아름다움'은 동격이다. 기존의 앎을 깨뜨리면 얼룩이 생기고 깨달으면 무늬가 생긴다. 아픈 앎의 뒤안길에 생긴 숱한 얼룩이 아름다운 무늬가 된다.

아름답게 보이는 쇼윈도의 마네킹 뒷면에는 수많은 시침이 꽂혀 있다. 마네킹은 보이지만 마네킹을 아프게 하는 시침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앎의 무늬이지 아픔의 얼룩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얼룩 없이 앎의 무늬가 생기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면 아프다. 그 통증을 감내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앎의 행로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앎의 행로를 부단히 전개하는 것밖에 없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배움은 그래서 새로운 것을 아는 과정인 동시에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알면 알수록 기존의 앎이 허술하거나 부실한 앎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앎은 앓음인 것이다. 기존의 앎에 심한 생채기를 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앎에 환멸을 느껴야 하고 심각한 불편함과 심지어는 도덕적 분노를 느껴야 한다. 한마디로 기존의 앎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야 한다. 환멸 없이 환상 없고, 일탈 없이 해탈 없다! 환멸의 끝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환상이 시작되고, 정상에서의 궤도 이탈이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끝에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리며, 해탈의 경지에 접근할 수 있다.

기존의 앎에 생기는 상처의 강도가 커야 그 만큼 깨달음의 깊이도 커진다. 기존의 앎에 새로운 앎을 부단히 접목시켜야 새로운 앎의 열매가 열린다. 마치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목하는 이치와 같다. 고욤나무에서 감이 열리기 위해서는 고욤나무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 사이로 감나무가 접목돼야 한다. 고욤나무의 상처는 결국 감이라는 열매를 탄생시키기 위한 고통이다. 고욤나무에 생긴 상처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고욤나무에서 감(敢)히 감(甘)이 열리는 것이다. 새로운 앎도 깊은 상처 위에 피는 꽃이다. 이전과 다른 앎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이전과 다른 앎이 기존의 앎에 접목되는 아픔을 감내(堪耐)해야 된다.

끊임없이 이전과 다른 앎을 찾아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 앎은 책에서 찾을 수 있고, 읽은 책을 소화시키기 위한 산책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찾은 앎이 궁극적으로 내 삶에 접목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앎을 삶에 적용해보고 실험하고 모색해봐야 한다. 체험적 깨달음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존의 앎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철학의 스승은 머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발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색다른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손발을 움직여 깨닫는 체험적 앎이야 말로 내 몸에 체화되는 진정한 앎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길에서 찾은 낯선 체험적 자극의 불편함이 생기를 되찾아 줄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매일 매일의 친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불편함의 세계에 자신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켜놔야 한다. 그럴수록 기존의 앎은 심각한 불편함을 겪게 되고 아픈 생채기가 생채기 위에 얹혀 생긴다. 상처투성이의 앎에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긴다. 그 견딜 수 없는 심각한 아픈 통증 후에 찾아오는 잠깐 동안의 앎의 희열은 다음 상처를 견디기 위한 기반일 뿐이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낯선 세계, 불안한 앎의 세계로 자신의 몸을 내던져야 한다.

이렇듯 공부나 삶이나 상처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상처의 골이 깊을수록 깨달음의 깊이도 깊어지는 것이 공부고,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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