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떠났다. 벌써 오래전에.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남아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있다. 6월이 되면 아이들이 그를 찾아와 용감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간다. 金在玉교사. 6·25 최초의 전과인 '동락전투'에서 최고의 수훈을 세운사람이다. 신출내기 교사였던 그로 인해 수많은 주민과 군인이 목숨을 건졌다.
김교사는 1949년 충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 그 이듬해 6월 동락초등학교에 부임했다. 6·25가 발발하기 5일전이었다. 7월7일 음성-충주간 중간지대에서 적과 우리 군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당시 인민군은 동락초등교를 중심으로 연대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했다.
국군은 인근 가엽산에서 매복작전중이었다. 주민들을 살리고 학교를 되찾을 때라고 김교사는 판단했다. 농부 옷을 갈아입고 가엽산을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매복작전중이던 제7연대 2대대장에게 적 15사단 48연대와 포병대대의 배치 상황을 제보할 수 있었다. 김교사의 제보를 받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제2대대장 김종수소령은 제6, 7중대로 적의 퇴로를 차단케하고 각 중대를 공격지점으로 이동배치했다.
학교로 돌아간 김교사는 이번에는 인민군에게 거짓정보를 흘렸다. 국군이 진주하고 있던 무극리 일대에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내용을 적 48연대에 알렸다. 적군은 안심한 채 경비를 소홀히 했다. 오후 5시부터 국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불의의 기습에 적은 대피하기 바빴고 대부분의 인민군은 섬멸됐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8백여명의 적을 사살하고 9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차량 60대, 장갑차 3대, 소총 1천여정, 박격포 35문, 기관총 47정, 포 12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 한 여교사의 호국정신으로 '동락전투'라는 우리군 최초의 전과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김교사는 3개월후 이 전투에 참가했던 소대장과 결혼을 했다. 그의 활약으로 우리군은 훌륭한 전과를 올렸지만 김교사 자신은 남편의 임지인 강원도 인제에 머물다가 63년 10월 으른바 '고재봉사건'으로 가족이 모두 참사를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김교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90년 동락초등교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충주교육청이 특색사업으로 벌이고 있는 '통일다짐교실'이 이 학교에서 열려 매년 2천여명의 초등생들이 그의 행적을 되새긴다. 통일다짐교실을 담당하는 김승래교사는 "김교사의 행적은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민에게 칭송돼야 할 일"이라며 "김교사의 뜻은 아이들의 통일교육에서도 유익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