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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은상>교육자로서의 보람을 일깨워준 태호를 생각하며





떨렸던 첫 결혼식 주례
2006년 12월17일 오후 3시. 부산 크라운 호텔 결혼식장은 하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신랑, 신부 양가의 모친이 화촉을 밝히기 위해 식장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그 뒤로 예복을 차려입은 신랑, 신부가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 역시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식장 안쪽 주례석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50대 초반의 내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난생 처음 결혼식 주례를 맡은 날이었다.

그동안 여러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참석하면서 주례사를 잘 보아두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내 머릿속은 온통 ‘주례를 멋지게 진행해야 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실수 없이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이윽고 결혼식이 시작되고 양가 모친이 화촉 점화를 마치자 사회자가 주례를 소개하면서 “특별히 하객 여러분께 신랑이 부탁하는 말씀을 전해드린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저는 오랫동안 방황하며 자포자기에 빠져 수차례나 학업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례를 보시게 된 제 고교 담임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격려하고 설득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제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늘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선생님 덕택이었습니다.”

2년간 긴 방황의 시작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태호(가명)와 함께 한 20여 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995년 당시 태호는 부산해사고 2학년이었다. 나는 3학년을 거쳐 졸업 때까지 2년간 태호의 담임이었다.

태호는 평소 말이 적고 자기 의견을 잘 내세우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온순하면서 어딘가는 외로움에 찬 모습이 있었는데 2학년 1학기 중간쯤부터 서서히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급우를 폭행해 상처를 입힌 것도 모자라, 수업 중 무단이탈, 장기 결석, 가출을 쉽게 반복했다.

안되겠다 싶어 1학년 때의 생활기록부를 보니 태만으로 인한 결석이 많았다. 그래서 태호와 면담하고 어머니와도 면담을 해보니 가정불화가 원인이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대화가 거의 단절된 상태였고 형제나 누이도 없는 독자인데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대화 상대도 없이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혼자 견디다 보니 사춘기의 반항적 성향도 보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가정과 학교생활 모두에 의욕을 잃고 부모님은 물론 급우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대부분 홀로 지내곤 했던 것이다.

우리 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기 때문에 2학까지는 전원이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1995년 9월 어느 날 아침 태호는 기숙사에서 나와 교실에 오지 않고 무단이탈했고, 그해 12월 중순까지 수차례 무단이탈과 결석, 가출을 반복하고 자퇴하겠다며 버텨 진급에 필요한 출석일수를 겨우 채웠을 정도였다.

그래도 희망을 가진 이유
태호가 가출하면 나는 태호와 가까운 급우들이나 집 주변의 중학생 시절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했다. 간혹 태호의 소식을 듣거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고 태호가 나타날 만한 곳에서 밤 늦게까지 잠복해 몇 시간 동안 기다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태호를 찾기도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번은 태호가 가출한 후 부산 광안리 해변의 모 카페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밤 11시경 무작정 찾으러 갔다가 덤으로 골방에서 합숙하고 있는 다른 반 가출 학생까지 찾아 학교로 데려온 적도 있었다.

주위 선생님들은 “담임이 그렇게 애써도 가망이 없고 결석일수만 자꾸 늘어나는 것 보니 아무래도 자퇴시키는 게 좋겠다”고 말하곤 했고 태호 어머니도 그만 지쳐서 자퇴시키라고 했지만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태호는 심성이 착하게 보였고 단지 오랫동안의 가정불화를 지켜보면서 여린 마음에 일시적인 방황을 하게 된 것뿐이고, 이 고비만 넘기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니 포기하면 안 된다”고 어머니를 설득시키기도 했다.

태호는 가출 후 스스로 학교에 온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찾아서 학교로 데려온 경우와 가출했다가 집에 돌아와도 학교에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학교에 데려오면 학교에서, 집에 있을 경우엔 집으로 찾아가서 애가 타도록 달래고 설득하기를 반복했고 그래서 마지못해 등교하면 며칠 후 무단결석 또는 가출하기를 반복했다.

누적 결석일수가 증가함에 따라 나는 점점 더 조급해졌고, 태호는 검정고시를 치르겠다고 자퇴 처리를 해달라며 등교 거부를 고집해 참 애를 많이 태웠던 것 같다.

12월 중순경. 결국 최후의 날은 찾아왔다. 그 때 태호는 집에서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다. 곧 겨울 방학이니 방학 전에는 그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출석일수를 채우지 못해 자동 퇴학이 될 것이었다.

우리 학교는 해운 계통의 특수목적 고교로 당시엔 교육 과정상 필요한 승선 실습을 위해 해외로 가기 때문에 병역 의무와 관련한 나이 제한이 있었다. 그래서 퇴학을 하면 재입학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날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약 3시간 동안의 설득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태호가 필요한 것을 찾아내서 그의 뜻대로 들어주고자 했다. 태호도 나의 정성에 매정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내가 희망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질긴 생고무줄’ 같은 교사
태호와 나는 결국 서로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기로 결론을 봤다. 겨울 방학까지의 약 10일 동안을 태호는 나를 위해서, 겨울 방학 시작 후 약 40일 동안은 내가 태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기로 했다. 태호가 나를 위해서 할 일은 그가 등교하는 것이었다. 내가 태호를 위해서 할 일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태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는 태호와 나의 이야기가 특이한 사례로 분류됐다. 태호에게는 ‘질긴 고무줄’, 나에게는 ‘더 질긴 생고무줄’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태호는 3학년 동안 마음을 잡고 학교생활을 충실히 해나갔다. 승선 실습과 병역 의무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 4년 동안에도 틈틈이 안부 전화를 하고 학교에 찾아와 인사를 하곤 했다.

2006년 11월 어느 날, 태호가 아가씨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결혼 날짜를 잡고 내게 주례를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양가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아직 주례할 나이도 아니고 경험도 없거니와 대학교수님을 모시면 결혼식 품격이 높아 보일 것이란 말로 사양하고 돌려보냈다. 다음날 태호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첫 테이프 끊으시소. 태호가 선생님 주례 안 서면 장가 안 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주례사를 썼다, 고쳤다 하며 외우고, 카세트 녹음기에 녹음해서 들어보기도 하며 준비하게 된 것이다.

태호는 결혼 직후 필리핀을 거쳐 현재 호주에 정착해 부인과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살고 있다. 얼마간 수습사원으로 근무하다 재작년에 글로벌계 회사에 정식 사원으로 스카웃 됐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태호의 결혼식 주례를 시작으로 지금은 여러 제자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고 있으며 그 덕분에 지금은 노련한 주례 선생님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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