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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진흙판에서 금속활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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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02.03.18 00:00:00
전자책이 나오기까지 책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진흙판에서 두루마리 파피루스, 양피지를 거쳐 금속활자까지, 그 역사의 발자취를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의 '독서의 역사'(정명진 譯/세종서적)를 통해 추적해 보았습니다.

진흙 서판(書板)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서판 조각들은 보통 네모 반듯했지만 간혹 3인치 정도의 직사각형 진흙판일 때도 있었다. 손으로 쉽게 쥘 수 있도록 편리성을 고려해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손에 쥐도록 만들어졌던 것 뿐 아니라 중앙 아시리아 법전 같이 매우 큰 표면에 쓰여진 텍스트도 존재한다.

아슈르에서 발견된 이 법전은 제작시기가 B.C.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크기는 67 평방피트, 텍스트를 양면에 세로로 담고 있다. 이 '책'은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세워놓고 누구나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메소포타미아 독서가들의 눈에는 그처럼 거대한 법전이 법의 권위에 더욱 무게를 싣는 것처럼 비쳤던 모양이다.

파피루스와 양피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파피루스의 생산 비결을 국가 기밀로 지키도록 하고 수출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페르가몬의 통치자이자 그의 라이벌이었던 에우메네스가 새로운 재료, 양피지를 발명하도록 자극했다. 이탈리아에서 종이가 출현할 때까지 양피지는 유럽 전역에 걸쳐 책을 제작하는 데 가장 사랑 받는 재료였다. 갈대 같은 식물의 줄기를 찢어서 말린 파피루스는 두루마리로 만들 수 있어 편리했지만 쉽게 부스러지는 성질 때문에 접어서 소책자로 만들기는 불가능했던 반면 동물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는 자르거나 갖가지 형태의 크기로 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질기고 부드러웠을 뿐만 아니라 값까지 싸 더욱 인기가 있었다.

양피지 코덱스(codex)
양피지 코덱스는 관리와 성직자, 여행자, 학생들에게 환영받는 책이 되었다. 책장 양면에 텍스트를 담을 수 있고, 코덱스 책장의 네 귀퉁이에는 여백까지 생겼다. 여백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제든 쉽게 해석을 달고 논평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독서가들에게 텍스트의 이야기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두루마리로 읽을 때는 기대하기 힘든 참여 의식이었다. 서기 400년경 책은 사각형, 여러 장 모은 형태로 틀이 잡혔으며 16세기 경에는 종이를 접는 형태가 공식화됐다. 프랑스에서는 1527년 프랑수아 1세가 왕국 전역에 걸쳐 표준 종이 크기를 정하고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투옥시킨다는 칙령을 내렸다.

구텐베르크와 인쇄기술 혁명
젊은 목판공이자 보석 세공사였던 구텐베르크는 나무 판목보다 거듭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활자 형태로 철자를 깎는 것이 효용성이나 속도 면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험을 거듭했다. 활자의 자면(字面)을 주조하는 데 필요한 금속 조각, 포도주 양조와 책 제본에 각각 사용되던 압축 기계의 특징을 결합한 새로운 압축기계, 그리고 기름 잉크 등이 그렇게 발명되었다. 1455년 구텐베르크는 각 페이지에 42행을 담은 성경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의 발명품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에서는 1465년, 프랑스에서는 1470년, 스페인에서는 1472년,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1475년, 이어서 덴마크에서는 1489년에 각각 인쇄기가 세워졌으며 이 인쇄기로 3만여 권의 책이 인쇄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5세기의 인쇄량이 통상 250부 미만이었고 1천 부에 달하는 책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구텐베르크의 위업은 가히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글자를 발명한 이래 처음으로 신속하게 많은 양의 책 생산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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