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회 사업’ 내세워 예산 집행
일선 "학운위 무시" "자율성 침해"
교총 "강제 배포 즉각 중단해야"

서울교육청이 관내 중·고교에 ‘친일인명사전’의 구입 강제를 추진하면서 학교자율성 침해와 학교도서관진흥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학부모단체가 배포금지 소송을 제기하면서 일선 학교는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학습 자료로 쓰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갈등이 예상된다.
시교육청은 최근 관내 583개 중·고교에 30만원씩 총 1억7000만원을 내려 보내고 오는 24일까지 구입 결과를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들은 법을 어기면서 지침을 따르라는 명령에 난감해 하고 있다.
학교도서관진흥법에 따라 신규 도서 구입 시 학교도서관운영위원회(학교운영위원회 겸 가능)를 거쳐야 하는데 학운위 의견과 관계없이 시교육청의 ‘강매’ 지침을 따르자니 법 위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에 따른 학교자율성을 강조하면서 ‘강제 집행’을 요구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이런 이유로 서울디지텍고는 공개적으로 구입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이 학교에 이어 공개 거부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비공개적 거부 움직임은 상상 수 관측된다.
A고 교장은 "그냥 무시할 것"이라면서 "도서 구입은 학교가 알아서 할 사항이므로 교육청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고 일축했다.
B고 교장 역시 "학교에 부담될 것 같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강행하는 교육청이 더 나쁘다"며 "학교가 필요하면 알아서 사도록 해야 한다"고 구입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C중 교장은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책 구입을 강요하는 교육청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어쩔 수 없이 구입해야 한다면 학습 자료로 내놓지 않고 교장실에만 비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민족문제연구소에 노골적으로 예산을 지원해주자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해당될 경우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라고도 지적했다.
그러나 교육청은 교육청 사업이 아니고 시의회 사업이니 학교가 자체적으로 구입할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책임 역시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희연 서울교육감은 "이번 친일인명사전 배포는 의회 주도 사업이고 우리는 집행할 책임이 있다"며 "일부 반대 의견에 몇 개월 미뤘지만 의회의 강력한 요구에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학교도서관진흥법 위반 역시 학교예산이 아닌 목적사업비로 내려준 것이기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조 교육감은 "학교도서관진흥법의 경우 학교도서관이 자체 예산으로 어느 책을 사느냐의 문제이고, 이번은 시의회가 목적사업비로 지정해서 내려 보낸 형태이기 때문에 별개"라고 말했다.
이어 "책은 책일 뿐"이라면서 "보수적이던 진보적이던 학교도서관엔 그 어떤 책도 많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고, 아무리 진보적인 책이라도 교사가 보수적 관점에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니 비치 자체를 두고 문제를 삼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를 순수하게 보는 교육 관계자는 드물다. D고 교장은 "이 사업이 잘못됐다고 여겼다면 시의회에 재의 요구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라면서 "결국 교육청이 직접 추진하기에 무리가 따르니까 시의회 핑계를 대고, 또 직접 사서 배포하면 문제가 될 것 같으니 예산만 주면서 학교장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꼼수"라고 꼬집었다.
논란이 가중되자 교육부는 서울교육청에 친일인명사전 구입과 관련해 학교도서관운영위원회와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치도록 한 규정을 지켰는지를 오는 29일까지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학부모들도 자녀 교육이 달린 문제인 만큼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자율교육을위한학부모연합(자학연)’을 비롯해 ‘좋은학교만들기학부모모임’ 등 학부모단체들은 서울교육청이 교육기본법 제6조의 정치적 중립의무,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제23조 조사대상자의 보호규정, 지방재정법 제3조 지방재정 운용의 기본원칙 등을 위반했다며 예산집행 정치 가처분신청과 함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조진형 자학연 상임대표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과 다른 기준으로 친일을 규정하고 있어 친북 친일인사를 누락하고 있는 만큼 객관적 학습 자료가 될 수 없다"며 "법적 규정이 아닌 자의적이고 편향적으로 선정된 친일행위자에 대한 교육을 통해 향후 수능이나 논술 등 인용사례 작성 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렇지만 진보교육감들은 이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어 갈등은 확산될 전망이다. 일단 경기교육청이 다음 달 친일인명사전 구입 예산 집행을 계획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총은 "사회·학계의 이념 논란이 있는 친일인명사전으로 인해 더 이상 학교를 논란의 장으로 만들지 말고 배포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