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의 열기, 황우석 박사님에 대한 절대적 지지. 이러한 몇몇의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은 국민들의 어떤 열망, 폭발할 것 같은 간절함이 입구까지 꽉 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태일씨가 항거하며 죽던 그 시절은 어쩌면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분노한 민중들의 항거와 같았을지 모른다. 그
러나 그 시절은 사회의 기반이 성숙하지 않았으므로 다 몰락하고 말았지만 한국은 그로부터 시작하여 정권이 바뀌기까지 하였으니 사회적 기반이 성숙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강한 요구, 한국이 남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나서고 싶어하는 욕구, 누군가 앞장서서 시대에 맞는 질서를 만들면 기름에 불을 붙이듯 확 일어설 것 같은 팽배가 느껴진다.
건너마을은 저만큼 앞서가든 말든 윗집의 벼에 낱알이 몇 개 더 달렸다고 저들끼리 아옹다옹하며, 시샘하고 그 동네 사람 끼리끼리 뭉치며, 헤어지며 살던 마을 수준의 제도와 사고방식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는 폭을 넓혀 건너마을도 바라보고, 산넘어 동네와도 시샘을 하고 경쟁을 하여 앞서 달리고 싶은 욕구의 분출인가? 동네 수준을 벗어나 국제수준으로 가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여겨진다.
현재 국제수준의 틀은 선진국들이 만들어낸 규칙과 원칙이다. 한국은 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강한 반발 그리고 한국 자체의 현상을 분석한 연구들과 시각, 전문가들이 적다보니 남의 것을 모델로 적용하고 그러한 가운데 생각하지 못한 불상사들이 나타나 혼란한 듯 보인다. 이러한 불상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길을 만들려면 돌도 뽑아야 하고, 나뭇가지도 쳐내야 하며, 손가락도 베이고, 상처도 생긴다.
선진국이 된 나라들의 특징을 보면 한결같이 그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 남만 따르며 만들어진 2등은 안되는 것이다. 이제 한국도 사람들이 중심에 ‘한국’을 놓으라고 아우성이며, 그 한국을 내놓으라고 촛불들고 거리로 나서고, 개인이 손해를 좀 보더라도 자신의 것들을 내놓겠다고 야단이다. 예전에 ‘금모으기’를 할 때 김박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프랑스의 정치가들이 매우 부러워했단다. 세상에 그런 국민들도 다 있냐고 하면서......월드컵의 응원물결, 황우석 박사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는 애국주의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힘에 의한 억눌림에 대한 ‘한’의 분출과 그를 벗어나 앞을 향해 나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아닐까.
국제적인 틀을 만든 선진국은 투명하고, 공정한 제도, 세밀한 목적에 군더더기 없이 직선으로 달려가 한 세기를 열었다. 잘하는 사람을 우대하고, 중간에 쓸데없는 것들이 끼어드는 것을 막고, 당사자들끼리 바로 만나 해결한다. 이러한 사람간의 관계는 생활환경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0분 후에 실내를 따듯하게 만들려면 지금 보일러를 돌리면 된다. 빨래를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바로 세탁기에 놓고 돌리면 건조까지 다 되어 나온다. 인스턴트 식품이 발달하여 레인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그대로 한끼의 식사가 된다.
한국도 생활환경은 미국과 거의 비슷해졌지만 사람간의 관계는 옛 틀 그대로이므로 젊은 사람들은 욕구는 높아졌는데 서구와 달리 유교적 전통이 깊이 살아있으므로 내적으로 그 에너지가 몰려 폭발직전까지 팽배진 것 아닌가? 사람, 생활, 사회 이 모든 것은 함께 맛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기형적으로 한쪽은 발달했는데 다른 한쪽은 그러하지 못하니 균형이 이루어지기까지 충돌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서구의 이러한 틀은 현재 한계를 맞고 있다. 효율성을 생각하여 직선으로 쭉 파여진 논의 물길은 한쪽에 비가 많이 오면 그대로 물살이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와 준비할 틈도 없이 단시간내에 수많은 마을을 물속에 잠기게 한다. 물길이 꼬불꼬불했던 예전의 샛강은 중간중간 물길이 넘쳐 약해지기도 했으며, 돌아가야했으므로 아랫마을은 방비를 할 여유가 있었다. 음식을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했던 시절에 아이들은 참을 줄을 알았다. 인스턴트에 길든 생활은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주어 잠시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여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마주 달리는 시합을 하다가 그야말로 산화가 되는 사건같은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전문분야에 익숙한 사람들은 타인의 영역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 소통의 단절이 살벌할 지경이다. 한쪽으로 얼굴을 돌리는데 이해관계가 없으면 친절히 웃다가도 얼굴이 반정도 돌아가며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효율적이지 않은 일에 1초의 시간도 아까운 것이다. 자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가? 정신의 안정과 만족을 위한 효율, 사회적 보상의 효율로 설명을 해본다. 한편으로 직선의 효율을 강조하면서도 공동체의 해체를 우려한 자선과 봉사의 제도를 만들어 놓은 그 사람들은 확실한 리더들이다. 장기판 전체를 보면 말을 놓은 것이다.
각자가 한 사람의 리더가 되어 한국의 이 넘치는 에너지를 어떠한 그릇에 담아 승화시켜야 할지 생각해본다면 어떠한 제안들이 나올까?
우선은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특징을 살펴야 할 것 같다. 한국인을 말하면 대표되는 단어가 ‘끈끈한 情’ ‘신바람으로 정의되는 風’ 그리고 숱한 고통에서 비롯된 ‘아리랑의 恨’이 아닐까? 하지만 이중에 ‘恨’의 정서는 요즈음 40대 미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단군이래로 가장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에 태어나 ‘한’이라고 할 만한 일들을 겪지 못했으므로 한강의 신화를 만들어낸 무대포적인 ‘도전정신’이나 ‘열정’ ‘부지런함’을 넣을 수 있겠다.
‘끈끈한 情’ 싫어서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나섰다가도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말을 들으면 미안해하며 달려간다.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다’는 말은 이 끈끈한 정에 다시 한번 기대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새는 이러한 정이 많이 퇴색하였지만 이런 정서는 여기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에게도 보여진다. 서로 간에 싸움을 하였는데 사과할 기회도 안주고 이사를 갔다고 원망을 한다. 단절이 아니라 미운정, 고은정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엮어 사는 것이다. 따라서 남의 일도 미주알고주알 알고 싶어 하고, 말들을 물어내므로 분란들이 생긴다.
이러한 ‘情’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살리는 사회적 불문율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보니 물론 사람이므로 남의 말을 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칭찬을 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도록 무수히 훈련시킨다. 심성이 훈련으로 해서 고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사회적 통념은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단시일내에 되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세월동안 그러한 행동은 저열하고, 천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으로 각인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분재를 키우듯 다듬고, 모양을 만들어 틀을 형성시켜주어야 하는 것이다.
신바람 風. 월드컵의 4강 신화가 대표적인 風의 사례가 아닐까? 물론 개최국의 프리미엄이니 심판이 봐주었다느니 하는 불편한 심기들의 노출이 있었지만 한국의 목표는 16강이었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 개최하였다고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개최국 프리미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운동의 승전보뿐 아니라 시민들의 협조정신 또한 신바람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전했던 경기장을 개인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가라고 하자 아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갔고, 봉사자 훈련에 두 번만 빠져도 안시켜준다고 주최측이 엄포를 놓을 정도로 자원봉사자가 많았으며, 열심히 지침에 따랐다. 남의 눈을 중시하는 문화의 발로였는지 어찌되었든 잔치를 벌여놓고 나라를 망신시키면 안된다고 ‘애국주의’가 전국에 물결쳤다. 학교의 교실에, 거리에, 운동장에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운동장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집에서 관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집에서 모두 나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불편하게 앉아서도 불편한 줄을 모르고, 골을 넣으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손바닥을 부딪히며 축하하였다.
신바람이 날 상황은 아니나 ‘금모으기’도 같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에도 갓난 아기 돌반지부터 팔십, 구십의 어르신까지 모두 동참을 하였다. 촛불시위, 황박사님 구하기도 같은 맥락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신바람도 강약을 조절하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나 이 훈련은 이성을 가진 리더들의 몫이다. 한국 사람들의 교육수준은 대단히 높으나, 합리적인 설명에도 그 이전의 관행들이 앞에서 말하는 것과 뒤에서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 믿지 못하는 까닭으로 우선 ‘우기고 보기’가 많다. 리더들이 시민의 믿음을 얻도록 스스로의 행동을 조심하면서, 동시에 법을 어기는 행동에는 엄격한 원칙을 세워가야 한다. 요사이 ‘황박사님 구하기’는 시민들 스스로 자제를 하며, 방송국도 살리고, 연구팀의 사기도 올려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무대포적 挑戰정신, 열정 그리고 부지런함’ 功過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원천이며, 이러한 재능은 당시의 리더들의 국가 재건의 계획에 의해 발굴되었고, 이끌어졌으며, 한국이 오늘날 세계에 잘난체 하고 살아가게 할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은 사실이다. 또한 21세기의 주역이 되도록 이끄는 근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가는 도전정신의 무대포는 존재할지라도 일을 이끌어 가는 방식에서 위와 같은 무대포는 존재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특성에 국제규칙의 효율성을 접목시켜 사회 가치와 기준을 재창조하여, 단점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장점으로 개발시키고, 이러한 새로움으로 물질의 세계 즉 경제를 이끌어가야 먹고 사는 문제도 비전이 보일 것이다. 새로운 정신과 가치 그리고 기준이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 나갈 眼目을 키운다. 새로운 정신은 잊혀졌던 그리고 무시되었던 한국의 옛 선조들의 자취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 이 땅과 사람들에 대한 고뇌의 소산인 많은 정보, 확실한 정보를 지닌 보고이며, 후손들에 대한 애정, 배려, 희망, 歲歲年年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동향에 관한 연구, 한국내에만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또 일부의 국가에만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그런 나라가 있었어?’라고 물을 만큼 알지못하던 곳에도 아이들의 관심이 미치게 하며, 남극의 얼음나라에도, 깊은 바닷속 어둠의 세계에도, 지구 속 들들끓는 불길의 세계에도, 그리고 광활한 우주의 세계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도록 실수를 허용하고, 예의를 갖춘 개성과 독특함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존중되고, 그러한 삶은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