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의 쓸쓸함이 마음을 짓누른 며칠. 22년 동안 바쁘게 달려간 시댁을 향한 발걸음이 멈춰진 명절을 2년 째 보내며 바쁘던 그날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징조인가 봅니다. 설 전날 부랴부랴 시장을 보고 빳빳한 새 돈을 시부모님 두 분께 따로 내밀던 내밀한 기쁨을 더는 받아줄 분이 지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서글픔.
시집갈 때 꼬맹이였던 조카들이 안고 온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굵어진 나이테를 확인하면서도 즐거웠던 귀성길 추억이 이젠 구심점을 잃어서 각자의 삶터에서 제각각 설날을 보내고 성묘하느라 잠깐 만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짧은 만남으로 하루쯤 시간을 내면 되는 날로 변모되었습니다.
예전에 이미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어른의 자리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명절이니 이제 내가 우리 시부모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렇게 울타리가 되어야함을 생각하며 서서히 자식들을 위해 준비하는 어미노릇을 생각합니다. 올해는 군대에 간 아들의 빈자리를 전화 목소리로 채웠지만 내년부터는 자식들을 위해 장만도 하고 설빔도 챙겨야겠습니다.
갑자기 겁이 났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에 느꼈을 법한 상실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 앉아 있다가 다시 찾아온 느낌. 두 남매와 남편을 위해, 멀지 않은 미래에 생길 나의 며느리와 사위를 위해 나도 시어머님이 하시던 것처럼 연습을 해야 함을 생각했습니다. 22년 동안 시어머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만 하면 되었던 절차를 나 혼자서 고스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방학 숙제를 끝내지 못하고 학교에 가는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무겁습니다.
둘째 형님이 내려와 계신 시골집을 찾아 설 전날에 전해 드릴 선물을 안고 찾아갔습니다. 싱싱한 고기가 상하지 않도록 미리 가야 한다며 재촉하는 남편과 함께 찾아가는 시골길을 달리며 나는 자꾸 중얼거렸습니다. ‘시골집에 가면 어머님이 뒷밭에서 가꾸신 무로 담근 시원한 동치미가 제일 먹고 싶은데. 어머님이 담가 놓으신 시골 간장이 아직도 있나 몰라. 왜 이렇게 아이 밴 아낙처럼 작은 무가 달린 동치미가 먹고 싶지?’
예전 집을 헐고 새집을 지어서 없어져버린 예전의 그 시골집이 더 그리워졌습니다. 아마 정이 들어서이겠지요. 불을 때서 물을 데워 쓰던 토방이 높았던 옛날 집이 그림처럼 그려졌습니다. 7남매 시댁 형제간들이 각기 자녀들을 데리고 모여들면 앉을 자리도 부족해서 한꺼번에 식사를 하기도 버거웠던 큰 방에 메주가 걸려 있는 풍경도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이른 봄부터 손수 어린 쑥을 캐서 장만하시던 쑥떡, 고소한 콩가루 냄새를 풍기던 인절미의 말랑말랑한 촉감, 살얼음이 살짝 얼어서 뱃속까지 시원하던 식혜 한 사발이면 더없이 풍성했던 설날 풍경이 이렇게 생생한 영상으로 뇌리에 남을 줄은 참말 몰랐습니다. 나이든 어머님께 항상 일찍 일어나는 순서를 빼앗기고 온돌이 식으면 아침인가 보다하고 솜이불을 뒤집어쓰던 그날들이 정말 과거로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설날이 시아버님의 생신이어서 한 번의 세배로 생신축하의 절까지 대신하느라 꼭꼭 챙겨가야 했던 한복도 이젠 정말 입을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그리운 것은 모두 과거라는 그림 속에만 존재하는 가 봅니다. 일과 가사노동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면서도 명절만이라도 완벽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22년 동안 습관이 된 설날의 줄달음을 멈춘 지금. 나는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보다 갈 곳이 없다는 상실감에 빠지는 명절이 우울합니다.
음식을 장만하며 손위 형님, 동서들과 재담을 나누며 농담으로 깔깔대던 철없는 웃음이 등 뒤에서 들릴 듯한 데 시간은 과거형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이제 내가 어른노릇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하며 내년 설날부터는 그리움을 털어내고 상실감을 벗어던져서 씩씩한 아내와 어머니, 선생님의 역할을 다짐합니다.
생전에 잡채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시부모님은 그 음식을 해드리면 식사대신 잡채를 드시며 좋아하시던 모습까지 어제 일처럼 그립습니다. 자잘한 손질이 많이 가는 잡채는 평소에 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부엌에 들어가기 싫은데 팔순이 넘으신 어머님이셨으니 어쩌다 주말에 가서 진지라도 해드리면 아이들처럼 좋아하셨던 모습이 눈에 밟힙니다. 이렇게 그리움이 많이 남을 줄 알았더라면 좀더 자주 가서 좋아하시는 음식을 해드릴 것을.
시골집에서 어머님 역할을 하시며 찾아온 친지들을 맞는 형님께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형님, 아직도 어머님이 담그신 간장이 남아 있나요? 미역국을 끓일 때 그 간장을 넣어야 맛이 나는데.”
“그럼. 조금 남아 있으니 갈 때 한 병 담아줄게.”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2년이 넘었지만 어머님의 손끝이 닿아있는 시골간장을 소중한 보물처럼 안고 오며 나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진한 장맛을 어디 가서 맛볼까? 단내가 나는 장맛이 생전에 그리도 부지런하고 깔끔하신 성품을 닮았네. 어머님! 이제 저도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을 내는 삶을 준비할게요.’
음식 맛은 장맛이라시며 생전에 간장을 소중히 하시던 어머님 말씀이 ‘사람 맛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마음속으로 발효시켜 봅니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며 햇볕 좋은 봄날에 장독 뚜껑을 열어놓고 해바라기시키며 “거 참 장맛이 달구나!”하시던 어머님. ‘어머님! 당신이 남기고 가신 단내 나는 간장 한 병을 귀한 손님 모시듯 앉혀 놓고 사진 한 장 남깁니다. 부디 세상 짐 내려놓은 그곳에서 이젠 편하소서!’
개학이 얼마남지 않은 오늘. 3월이면 새로운 임지를 향해 가는 낯설음과 두려움에 마음 편하지 못했던 겨울방학을 털어내렵니다. 내 삶이 두고 갈 아이들에게 시골 간장처럼 단내나는 장맛을 주는 선생이었는지 되돌아보며 새로 만날 아이들과 동료들에게 오래될수록 깊은 맛을 내는 시골 간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의 크기는 사랑의 크기에 달렸다.'는 어떤 이의 말씀을 새김질하며 이제는 가족과 교실을 넘어 내 사랑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자신에게 각인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