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 전, 입학식 날이었다. 대열을 맞추라고 호통을 치는 학생부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 앞에서 장난을 치는 녀석이 있었다. 유난히 키가 작아서 그런지 한 눈에도 다른 아이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앞에서 지휘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가볍게 넘기는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골치깨나 썩이겠다 싶은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녀석과 나는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불행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우리 학급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만약 내 자식(?)이 된다면 옹골지게 다뤄 태도부터 고쳐놓겠다고 벼르던 마음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다만 내가 맡고 있는 과목은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마다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사람의 선입견이라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입학식장에서 보았던 녀석의 불량기는 수업시간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말그대로 수업에 충실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맡고 있는 국어 과목에서 녀석의 성적은 다른 아이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녀석에 대하여 품었던 선입견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소심해지고 심지어는 여성화되는 경우도 있어 틈만나면 공과 사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채근한다. 그런데 녀석은 내가 주문하는 바람직한 이상형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수업 시간에는 공부에만 열중하고 쉬는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는 자신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아이들끼리 웃고 떠드는 화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녀석이 있었고, 웃통을 벗어던지고 공을 차는 장소에는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내닫는 녀석의 화려한 발재간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또 일 년이 지나 고3이 되었다. 녀석과 나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는지 삼낸 내내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 도토리처럼 작지만 야무지기 짝이없는 녀석과 내가 함께 파트너가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듯 싶었으나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 학년 때까지는 여가시간이 생기면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운동에 열중하던 녀석도 삼 학년이 되자 짜투리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생판 공부에 취미가 없던 녀석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고3이 되면 정신차리고 공부하는 척이라도 한다.
사실 녀석의 성적으로 볼 때는 서울의 명문 K대학에 지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녀석은 1학기 수시에서 덜컥 K대학에 원서를 넣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교과를 맡고 있기 때문에 늘 친형님처럼 모시고 있는 녀석의 담임 선생님은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차피 수시모집이기 때문에 떨어져도 크게 손해될 것은 없지만, 그간의 예로 볼 때 수시에 탈락하면 그 충격으로 인하여 수능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무려 4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K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논술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녀석의 국어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열심히만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도 기대할 수 있을 듯 싶어, 틈나는 대로 녀석의 논술문을 일일이 살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합격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내신과 수능을 공부하면서 비는 시간을 활용하여 논술문을 쓰다보니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있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이 정도면 합격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멋지게 날아가고 말았다. 녀석도 실패의 아쉬움이 큰 듯한 눈치였으나, 그래도 2학기를 대비하겠노라고 당차게 말하는 것이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 무더운 여름도 잘 견디고 2학기에 접어들어서도 녀석은 목표로 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조금도 마음의 자세를 늦추지 않고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녀석은 2학기 수시모집에도 변함없이 K대학에만 지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시모집이라고는 하지만 K대학의 경우, 수능시험이 끝나고 열 흘 뒤에 논술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었다. 그토록 힘들게 준비했던 수능시험을 마치자마자 논술시험을 치르는 아이들만 별도로 모아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아마도 시험에 대한 부담을 떨치지 못한 듯 했다.
K대학의 논술시험이 있기까지 열 흘 동안은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다. 이 대학에 지원하는 여섯명의 학생과 나는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논술문을 쓰고 또 분석을 하면서 계속 같은 방식으로 반복을 했다. 내신이나 수능만을 반영하는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여섯명의 아이들과 나는 오히려 더 숨쉴틈 없이 입시 경쟁에 내몰려야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다는 희망감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한 녀석은 너무 어려워서 차라리 포기하겠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여섯명의 아이들 가운데는 이미 상위권 대학에 합격해 놓은 상태에서 편한 마음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1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K대학의 평균 경잴률은 40:1에 육박했다. 이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합격하면 대성공이나 다름없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열 흘이라는 시간도 훌쩍 지나고, 드디어 시험을 치르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논술 답안을 검토해 주고 서울로 떠나는 아이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건승을 기원했다.
여섯명의 전사들은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내려왔다. 이제 결과만 남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발표일이 다가왔다. 뚜껑을 열고 보니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겠다고 울먹였던 녀석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미역국을 먹었다. 합격한 녀석에게 축하의 말을 전해줄 겨를도 없이 탈락의 아픔을 곱씹고 있는 녀석들을 달래주는 것이 더 급했다. 특히 이번만은 반드시 합격할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녀석의 탈락은 그만큼 충격이 컷다.
수능성적이 워낙 낮게 나왔기 때문에 녀석의 K대학 도전은 여기서 끝나는 듯 싶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까지도 무모하다고 여길 만큼 녀석의 고집은 완강했다. 정시모집에서도 K대학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여섯명의 아이들가운데 이미 다른 대학의 수시모집에 합격했던 아이와 이번에 K대학에 합격한 아이를 제외하고 네 명이 남았다. 모두가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수능 성적이 어느 정도 갖춰졌기에 도전할 수 있었지만, 녀석은 설령 논술에서 만점을 받는다해도 합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한번의 숨막히는 준비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젠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을 만큼 지친 상황이 되어서야 정시모집도 끝이 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결과는 또 환희와 슬픔의 교차로 나타났다. 두 아이는 서울의 명문 Y대학에 합격했고, 한 아이는 서울의 중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이미 예상된 일이기는 했지만 녀석은 이번에도 탈락한 것이다. 다른 대학에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락과 동시에 재수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처럼 다른 아이들이 잘 됐어도 녀석의 실패는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있고 난 며칠 후, 차를 타고 가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고 있는 녀석을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마음이 안됐던지. 좀더 열심히 지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쳤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녀석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울에 있는 모학원에 등록을 했다는 것이다. 학원으로 떠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나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천근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졸업식 준비로 눈 코뜰 사이 없이 바쁜 가운데 일과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삼년 동안 정들었던 아이들과 헤어지기에 몸도 마음도 정갈히 하고 싶은 생각에 목욕탕으로 향했다. 모처럼 편안한 휴식을 즐긴 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방금전에 심부름을 온 사람이 놓고 갔다며 조그만 물건을 내놓았다. 포장지를 뜯자마자 먹음직스러워보이는 딸기가 눈에 들어왔고, 그 위에는 조그만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봉투를 뜯어보았다.
『선생님께 OO이는 참 행운아였습니다. 자칫 비껴갈 법도 했었는데, 선생님같은 스승을 만나 인연을 맺고,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선생님만의 열정적인 가르침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결과는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OO이는 선생님이 주신 능력으로 평생을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그 힘으로 대학을 다니고, 또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는 기획안을 쓰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 오래전부터 찾아 뵙고 싶었습니다. 이번 졸업식에 OO이는 참석하지 못하게 되지만, 졸업을 빌어 선생님께 그간의 고마음을 전해드립니다. 2006년 2월 9일 - OOO 母 올림 - 』
구절 구절마다 마음이 저려왔다. 자식이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재수의 길로 들어섰는데, 지도했던 교사를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선물에 편지까지 보냈으니. 흔히 아이가 잘되면 자식이 잘나서 그렇고 못되면 학교나 교사를 탓하는 풍조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결국 학원에 다니느라 졸업식에까지 참석하지 못할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아플 것인지. 날이 밝으면 녀석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올 해에는 반드시 기쁜 소식이 날아들 것이라고 다짐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