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나의 앞날을 상상해보곤 한다. 눈을 감고 몇 년 후를 떠올린다. 선생님이 되었다.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마음이 가득한 교실에서 나는 웃고 있다. 내 앞에는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 예쁜 아이들이 앉아있다. 그동안 그 예쁜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고 씩씩한 소위 ‘정상’ 판정을 받은 아이들이었다. 내가 기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 학기 학교에서 누리사업의 프로그램인 특수아동 통합학급 수업을 들었었다. 그 실습으로 내가 만나게 되었던 아이가 바로 기오이다. 이 아이와 나는 겨울 방학 한 달을 함께 보냈다. 기오는 맑은 아이였다. 기오를 만났을 때 정신지체라는 아이의 장애명보다 희망이 먼저 떠올랐다. 교육의 효과 등등의 그런 희망이 아니라 아이 자체에서 빛나는 것이 바로 희망이었다.
처음 만나고 돌아오는데 혼자 설렜다. 어떤 방법으로 아이의 마음을 열고, 무엇을 익히게 해야 나중에도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지금처럼 맑게 살아낼 수 있을까.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정말 너무도 적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장애'라는 이름의 벽에 다가갔지만 넘지는 못한 채 그렇게 한달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한달간의 만남 뒤에 아이의 눈빛이 나에게 들어왔다. 그 아이도 내가 사랑해야할 우리 아이라는 걸 맑은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내 생각 속 우리반 교실에는 기오도 함께 앉아있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애인의 날을 무심히 보낸다. 장애인의 날임을 아는 사람도 적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대생도 남의 일인 것처럼 장애인의 날을 무심히 보낸다. 우리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에 장애 아동은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교대의 정규 교육과정에도 장애 아동에 대한 과목은 없다.
세상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다. 약한 자, 소외된 자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하고 소외된자 역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학교는 건강한 아이들을 위한 곳만이 아니다. 장애 아이들에게 오히려 교육이 더 필요하다. “그들에게 교육은 생명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약하고 소외되었기에 그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리고 교사는 그 일을 맡을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