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지막 주를 기념하기 위한 선생님들만의 특별한 산행이 시작됐다. 4일간에 걸쳐 치러지는 2학기 중간고사가 막바지에 접어든 28일 오후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서산의 명산인 팔봉산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하는 등반대회이니 실로 오랜만의 등반이다. 특히 이번 등반은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이웃해 있는 서령중학교 선생님들과의 친목을 다지는 등반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약속 시간인 오후 2시가 되지 간소복과 등산복 등으로 갈아입은 선생님들이 하나 둘 교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의 표정에서 새털처럼 들뜬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나마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삽상한 숲 속의 공기를 마시며 덤으로 육체적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는 행복감이 선생님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
버스가 출발하자 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상조회징님의 오늘 행사에 대한 안내멘트가 시작되고, 산행하는 동안 먹고 마실 초콜릿과 생수가 각자에게 분배되었다.
버스는 대산 행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진행하다 방향을 틀어 다시 고남리 저수지를 옆에 끼고 30여 분쯤을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연한 가을 색이다. 길섶에는 여름내 늙은 농부들이 가꾸어놓은 두렁콩과 양배추들이 탐스럽게 여물어가고 산그늘에 가린 야트막한 야산에선 밤송이들이 입을 쩍쩍 벌리며 흰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다. 길가에는 어느 촌부가 널었는지 태양초가 빨갛게 익어 가고 푸른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벌써 곶감을 깎아 말리는 흥성스러운 풍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전원적인 풍경에 흠뻑 도취되어 있다보니 버스는 어느새 팔봉면 양길 2리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우리를 제일먼저 마중한 것은 팔봉산을 타고 내리던 맑은 공기도, 지저귀는 산새도 아닌 바로 장사꾼들이었다. 주차장 한 쪽 귀퉁이에 호박이며 고구마, 옥수수, 토종밤, 땅콩, 밤콩 등을 벌여 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아주머니들의 부름에 무작정 따라갔다가 찐밤 한 개를 얻어먹었다. 어른 손톱 만한 크기로 입안에 넣고 '딱'하고 반을 쪼개어 속을 파먹어 보니 맛이 일품이다.
소나무 숲 속으로 사행처럼 꼬불꼬불 뻗어나간 등산로를 타고 오르자 비로소 피톤치드의 싱그러움이 콧속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발걸음 또한 가벼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고개를 들어 하늘은 보니 울창한 소나무 숲에 가려 하늘은 볼 수 없었다. 대신 30분 정도를 걸었을까 거대한 산봉우리를 눈앞에 둔 지점에서 우린 숲 속에 난 작은 공터와 조우했다. 공터에는 약수터와 나무의자, 간이 화장실 등의 편의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공터를 지나자 제법 가파른 계단이다. 그곳에서 가을 풍경과 잘 어울리는 멋진 등산복을 차려입은 네 분의 등산객을 만났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던가. 공자 님 말씀처럼 산에서는 누구나 너그러워져 간단한 수인사로도 말문을 열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린 금세 한 팀이 되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한다. 한 손에는 카메라 또 한 손에는 생수병을 들었으니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낭이라도 메고 올 걸. 뒤늦은 후회를 해본들 소용이 없다. 그저 팔봉산을 너무 얕본 죄라 생각하고 감내할 수밖에.
생수 한 병을 거의 들이켰을 무렵 1봉과 3봉을 경계짓는 고개의 안부(鞍部)-산의 능선이 말안장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에 올라섰다. 팔봉 중 제1봉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5분 거리라고 한다.1봉 일대는 집채보다 큰 네댓 개의 바위로 이루어졌고 제3봉은 안부로 다시 내려섰다가 숲을 지나 바위벼랑에 바싹 붙어야 한다고 한다. 제3봉은 1봉보다는 거리가 멀지만 등산로에 밧줄이 매어져 있어 초보자도 등반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팔봉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3봉 쪽을 올라가야 한다고 하기에 우린 3봉 쪽을 택했다.
3봉으로 오르는 길은 소나무 숲으로 된 능선이 평탄하게 펼쳐지기 시작해서 비탈로 끝나가고 있었다. 비탈을 지나자 바위 위에 까마득하게 걸쳐진 쇠사다리가 나왔다. 깎아지른 벼랑을 오르다 그만 밑은 내려다봤더니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아차, 하고 실족하는 날엔 영영 이 세상과 결별일 것 같았다. 그 때부터 손에 땀이 배이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마침 면장갑을 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손이 미끄러워 불귀의 객이 될 뻔했다.
구름사다리를 통과하자 길이 6m,높이 2m 남짓한 통천문(通天門)이 나왔다. 하늘과 통하는 문이라! 정말 저 구멍만 통과하면 하늘과 만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때에도 하늘에 걸쳐놓은 것처럼 까마득한 벼량 밑에 뚫린 통천문이란 곳을 통과했던 기억이 난다.
통천문을 지나 다시 어린 아이 팔뚝만한 밧줄을 잡고 힘들게 기어오르자 어느 순간 시야가 탁 트인 절경이 갑자기 뛰쳐나왔다. 드디어 3봉의 정상. 저 멀리 태안의 백화산과 만리포 일대의 서해바다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다. 햐~ 탄성이 절로 나온다.
3봉의 정상에서 우린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땀이 눈 속으로 흘러 들어 따가웠지만 힘든 등반 뒤의 휴식은 달콤하고 행복했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문득 우리의 삶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바쁜 여정에서 잠시 뒤돌아봤을 때 아름다운 추억과 아름다운 사람의 영상이 그려지는 인생을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등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앞서가는 선두 그룹이 있으면 반드시 뒤쳐지는 후미 그룹이 있기 때문이다. 선두와 후미의 거리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나더라도 결국은 정상에서 만난다. 인생도 이와 같다. 아무리 아등바등 거리며 앞서가도 결국은 죽음이란 종착역에서 모두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앞서가는 선두는 뒤쳐지는 후미를 기다려줘도 그리 큰 손해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술도 마시자 않았는데 얼굴이 벌겋다. 막 물들기 시작한 초가을 단풍에 취하고, 다정한 대화에 취하고, 불끈하게 달아오른 팔봉의 양기(陽氣)에 취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