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려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아내가 내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아내는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아내의 그런 행동이 이상하여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 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요?”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해 줄 수 있어요?” “아니 무슨 부탁인데 그렇게 눈치를 보는 거요?”
대답대신 아내는 옷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아내가 준 봉투를 받아 들게 된 나는 봉투 안의 내용물이 궁금하여 봉투를 개봉해 보았다. 확인결과, 봉투 안에는 영어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여보, 이것 좀 해주시면 안돼요?" "이건 영어회화 책이 아니오? 그런데 무얼 해달라는 얘기요?"
내 질문에 아내는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는 듯 머뭇거렸다.
"영어 발음 좀 적어주세요." "발음이라니?"
사실 아내는 몇 달 전부터 지역 모(某)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개설한 영어회화 반에 등록하여 수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내가 건네 준 영어 회화 책은 다름 아닌 평생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습 교재였다. 책을 펴자 매 페이지마다 수강을 하면서 아내가 적은 내용이 깨알 같은 글씨체로 적혀져 있었다.
아내가 부탁을 한 것은 영어 문장 내에 발음이 잘 안돼는 단어를 우리말로 적어 달라는 것이었다. 영어 교사인 내가 보기에 사실 회화 책에 나온 대부분의 어휘는 중학교 수준이었다. 이 정도의 어휘라면 막내 녀석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말을 했다.
“여보, 이 정도의 단어 발음은 OO이도 알 수 있으니 OO에게 물어 보구려.”
내 말에 아내는 기분이 상했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책을 달라며 말을 했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라 보였다.
“알았어요. 죄송해요. 그럴게요.”
아내의 그런 말에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알았소. 해주리라.” “……”
그제야 아내는 화가 풀렸는지 대답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대학물을 먹었다고 한 엄마가 영어발음을 제대로 몰라 자식에게 물어본다는 것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학습도중 모르는 내용을 부모에게 물었을 때, 부모가 대답을 잘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 부모를 무시하고 얕보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때문일까? 아내는 자식보다 남편에게 무시당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침 아내는 혹시라도 책을 건네는 장면이 막내 녀석에게 들키기라도 할까봐 주위 시선에 신경을 많이 썼던 모양이었다.
문득 지난여름의 일이 생각났다. 막내 녀석이 수학 숙제를 하던 중 모르는 문제가 있어 내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애를 먹었다. 옆에서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막내 녀석이 한심스러운 듯 내게 이런 말을 던진 기억이 난다.
“아빠, 잘 모르면 학원선생님께 물어볼게요.”
막내 녀석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던진 말인 것 같은데 내게는 의미 있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한 그런 기분 말이다. 이제야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퇴근하여 아내가 부탁한 숙제를 막내 녀석 몰래 건네주었다. 숙제를 건네받은 아내는 그 답례로 근사한 저녁 식단을 차려주었다. 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나는 말없는 미소를 주고 받았다. 막내 녀석 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