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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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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잠시 눈을 들어 창 밖을 바라보니 보라색 등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알싸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교무실 앞 화단에는 분홍색 작약이 눈부신 자태를 뽐내는 5월의 하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교닷컴 독자 여러분!

저는 서산 서령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 김동수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꽃이고 녹음이고 아이들의 웃음입니다. 문득 교사가 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보석처럼 부서질 때 저는 무한한 행복을 느낀답니다. 오늘 수업시간도 아이들과 함께 실컷 웃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사연 때문이었죠.

저는 요즘 국어(상)에 있는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란 단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실학자였던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깨끗한 선비로 살아가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 보낸 편지랍니다. 자신은 오랜 유배생활로 아들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대신 가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정신적 지표인 '근검'과 '절약'을 물려준다는 내용이죠.

단원이 다 끝나고 아이들에게 정약용 선생의 편지에 대해 선생의 아들이 되어 자신의 생각을 적어오라는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물론 수행평가의 일환이었죠. 이윽고 한 주가 지나고 학생들이 모두 답장을 써왔더군요.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근검과 절약을 가슴에 새겨 평생 청렴하게 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녀석만이 다음과 같은 솔직한 답장을 써왔습니다. 저는 이 학생의 글을 읽으며 참 많이도 웃었습니다.

다음은 그 학생이 쓴 답신의 전문입니다.


아버지께

아버지, 유배지에서는 좀 지내실 만 하신지요?

아버지, 아버지의 깊고 큰 뜻은 알지만 우리집은 지금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무도 심고, 채마밭도 가꿀 형편이 못된답니다. 지금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유배지로 떠나신 뒤로 쓰러지셔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누워 계십니다. 집사람은 저보고 돈 벌어오라고 바가지를 긁고 애들은 밥 달라고 웁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유배지로 떠나신 후로 집안 분위기는 우울해졌고 모두들 아버지만 그리워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정말 죄송하지만 평소 돈 좀 모아놓지 그러셨어요. 정말 섭섭합니다. 옆집 개똥이 아버지는 개똥이에게 논 서른 마지기와 소 세 마리를 물려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아랫마을 말똥이 아버지는 말똥이에게 기와집 한 채와 돼지 열 마리, 소 두 마리, 논 스무 마지기를 남기시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남들은 자식을 위해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이랍니다. 물론 저도 아버지로부터 '근검'과 '절약'이란 두 가지를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니 크게 부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아버지,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크네요. 저는 지금 집사람의 바가지와 아이들의 성화를 피해 잠시 주막에서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정말 막막합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면 손가락질을 하며 쑤군거립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주신 근검과 절약을 되뇌어보지만 도대체 뭐가 있어야 절약을 하던가 말던가 하지요. 차라리 저도 아버지처럼 경치 좋은 유배지 강진에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며 한평생 살고 싶습니다.

급하게 먹은 수제비 때문인지 아까부터 시작된 딸꾹질이 멈추질 않아 이만 씁니다. 아버지, 그럼 유배지에서 건강 조심하시고 부디 평안하시길 빕니다.

아들 올림.

리포터는 이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인간의 행위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때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철저한 근검 절약이 미덕이 되었던 시대에 쓰여진 정약용의 편지가 적당한 소비가 미덕인 요즘에도 감동을 줄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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