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도 아리랑 고개의 유래
우리나라 사람에게 ‘아리랑’이라는 단어만큼 친숙하면서도 비애를 느끼게 하는 말이 있을까. 또한 ‘아리랑’만큼 해학성과 풍자성을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그리고 ‘아리랑’만큼 미스터리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 그 누구도 아리랑이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을 모른다. 그 누구도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으며, 또 어떤 경로를 타고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그렇게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모른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 비운의 혁명가 김산의 아리랑이라면, <진도 아리랑>은 영화 ‘서편제’의 한 많은 여인, 송화의 아리랑이다. 통인에게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한이 돌고 돌아 <밀양 아리랑>을 만들었다면, 아우라지 강가에서 넘치는 강물을 원망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여랑리 처녀와 유천리 총각의 안타까움은 <정선 아리랑>을 낳았다.
현재 우리나라에 구전하는 아리랑의 종류는 50여종 3000여수라고 하는데, 이 수많은 아리랑에는 ‘아리랑 고개’라는 말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그럼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 고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왜 하필이면 아리랑 고개라고 했을까?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산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산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산에는 반드시 고개가 있기 마련이며, 고개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숙명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 숙명적인 존재는 민초들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통로였다.
그러나 이 고개를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 식량과 식수를 이고 지고하면서 두 다리를 휘적휘적 저어 쉴 새 없이 가야하는 곳이 바로 ‘고개’이다. 꼬불꼬불, 굽이굽이, 아홉 고개, 열 두 고개가 바로 아리랑 고개인 것이다. 왕조와 양반 계급의 횡포에 못 이겨,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때로는 가뭄과 장마를 못 이겨, 이 땅의 백성들은 고개를 넘고 넘어 신세계를 찾아 갔다. 그 신세계를 찾아 가는 과정에서 슬픔과 애환이 어찌 없을 리 있겠는가.

서울 성북구의 아리랑 고개가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이라면, 부산 영도의 85번 버스 종점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는 영도 아낙네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서린 민초들의 고개이리라.
예로부터 부산 절영도는 국마장으로써 사람이 살지 않았다. 절영도의 절자는 끊을 절이요, 영은 그림자 영이다. 말이 하도 빨리 달려 그림자가 끊어질 정도라는 뜻이니 영도의 말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영도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881년 동삼동 중리에 수군인 절영도진을 설치하기 위해 국마장을 서구 암남동으로 옮기고부터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영도의 해안가로 몰려들어와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는데, 문제는 식량이었다.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은 지천으로 남아 도지만, 쌀과 보리는 늘 모자랐다. 결국 영도의 아낙네들은 말린 고기며 조개, 담치 등을 머리에 이고 오늘날의 범일동 부산진시장까지 가서 해산물을 팔았고, 그 돈으로 쌀과 보리, 기타 일용품을 사곤 했던 것이다.
당시 아낙네들은 부산장날에 맞추어 장을 보러 다녔다. 동삼동이나 청학동, 신선동, 영선동쪽에 살던 아낙네들이 부산 장을 가기 위해선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봉래동 바닷가에 있는 나루터의 배를 타야만 했다. 나룻배는 아낙네들을 용미산 나루터에 내려주었고, 그러면 아낙네들은 무거운 짐을 인 채 범일동 부산 장까지 고된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가는 길은 또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갈 때는 말린 해산물이라서 무게라도 가벼웠지, 돌아올 때는 쌀과 보리라서 머리 위에 인 짐은 천근만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영도로 돌아갈 때쯤이면 이미 날이 저문 뒤라 험한 고개 길을 연약한 아녀자들이 넘으려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해서 아낙네들은 반드시 무리를 지어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무거운 식량을 머리에 이고 험한 고개를 올라 온 여인네들은 고개 삼거리에서 너나할 것 없이 앉아 고달픈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다 보면 보퉁이에서 주전부리가 나오고, 점심 때 먹다 남은 주먹밥도 나왔을 것이다. 차갑고 딱딱해진 그 음식들을 씹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휘영청 밝은 달이 은빛도 교교하게 바다를 비춘다. 그 달을 쳐다보던 어느 여인이 애잔한 자신의 삶이 서러워 무심코 아리랑 가락을 읊조렸다. 그러면 옆에 있는 여인이 따라 부르고 곧 이어 뒤에서 앞에서 동시에 아리랑 가락이 터져 나왔다.
아리랑 가락은 어느새 합창으로 바뀌고 이 가락 저 가락으로 넘어가다가 진도아리랑 대목이 나오자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덩더쿵 덩더쿵 춤을 추었다. 상상해보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짙은 어둠에 싸인 산마루에서 달빛과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흰 옷의 여인들을. 그 서러운 가락과 눈물과 한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리.
성북동의 아리랑 고개는 영화 <아리랑>의 촬영지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거리 정비도 하고, 기념제도 개최하고, 상설 전시회도 개최한다고 한다. 그러나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영도의 아리랑 고개는 초라하고 낡은 식당의 간판에 작은 흔적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아리랑 고개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표지석 하나에, 고속도로 이정표에, 혹은 고속도로 휴게실의 간판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 고개의 옛 모습은 사라져도 아리랑 고개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고요한 정서만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