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군 상동면의 독일 마을을 찾아 그님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독일로 갔었다. 때론 가족을 위해, 때론 자신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 낯설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님들은 간호사로, 광부로 일하며 가난한 조국의 가족들에게 쌀과 반찬을 사기 위한 돈을 부쳤다. 그들이 부친 돈으로 가족들은 먹고 살았으며, 똑똑한 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세월이 무수히 흘러 어느덧 30~40년이 되었을 때, 그님들은 호호 할배, 호호 할매가 되어 다시 조국을 찾았다. 꿈에서도, 생시에서도 행여나 잊을세라 늘 가슴에 품었던 조국으로 그들은 돌아 온 것이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동천마을에 위치한 30여 동의 그림 같은 독일 하우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먼 이국의 풍경이 우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주황색 뾰족 지붕이 코발트 블루의 남해바다와 말없이 만나는 곳. 산과 바다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독일 마을에 오면 어느새 사람들은 낯설고 신기한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독일 마을은 60~70년대 머나먼 유럽의 대국인 독일로 떠났던 재독 동포들의 보금자리가 군집모양으로 이룬 마을이다. 남해군에서 삼만여 평의 대지에 40여 가구의 택지를 조성하여 독일 동포들에게
- 강진, 그 찬란한 슬픔의 땅에서 영랑을 만나다. 이라는 시에는 유독 ‘ㅇ'과 ’ㄹ‘음이 유독 많다. 그래서인지 읽기에도 편하고 듣기에도 편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는 우리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준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라고 노래하는 대목은 우리의 심성을 파스텔처럼 물들게 한다.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라는 대목은 우리의 정서를 톡톡 건드린다. 한마디로 영랑의 시는 편하면서도 불편한 시다. 정겨우면서도 낯설은 시다. 그러나 이 시의 백미는 뭐니 해도 말미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찬란한 슬픔의 봄을‘. 아, 이런 역설이 어디 있을까? 봄은 봄이로되 슬픈 봄이요, 그 슬픈 봄이 지독히도 찬란하다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허망함. 모란이 떨어져 버리는 순간과 그 모란이 다시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이다지도 애절하게 그려낸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강진군 남성리 탑동의 야트막하나 언덕에 자리 잡은 김영랑 생가. 때는 1월의 중순이었고, 남도 땅 강진과 해남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영랑
- 민초의 향이 서린 닭발을 먹으며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 민다’라는 속담은 시치미를 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닭은 달걀을 낳아주는 귀한 가축이었다. 또한 귀한 손님이 오면 씨암탉을 잡아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이렇게 귀한 닭을 몰래 잡아먹은 어느 생원이 전전긍긍하다가 오리발을 내밀었으니 그 뻔뻔함이야 일러 무삼하겠는가. 그런데 ‘오리 잡아먹고 닭발 내 민다’라는 속담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닭발은 그래도 먹을 수는 있지만 오리 발은 먹을 수도 없는, 천하에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귀한 가축인 닭의 모든 것을 먹었다. 닭 머리를 제외한 모든 닭의 구성 성분이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것이다. 닭발을 먹는다? 만일 푸른 눈의 이방인이 닭발을 먹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그네들의 생각과 문화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생긴 모습도 흉측하려니와 도저히 맛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닭발을 먹다니?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닭발을 잘도 먹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오도독 씹어가면서 먹었다. 늦은 밤, 10시. 부산 동래역 근처. 술집과 상점들이 몰려 있는 곳인지라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의 행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옆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 조명암 작사 꿈꾸는 백마강, 선창, 알뜰한 당신, 그리고 고향초...... 조명암이라는 이가 있었다. 충남 아산 출신으로 모더니즘에 심취한 시인이자 연극인, 그리고 5백여곡에 달하는 노랫말을 지은 사람. 그러나 분단의 아픔과 함께 북으로 넘어간 전력 때문에 남한에서는 금기의 인물이 되었던 사람. 암울했던 일제시대 였던가.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라며 민족의 아픔을 은근히 표현했던 시인은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이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민족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백마강에서 황포돛배를 타본다. 옛날 사진첩에서나 보던 고전적인 의미의 황포돛배는 아니지만 황포돛배에서는 내내 꿈꾸는 백마강이 흘러나왔다. 그 옛날 한성과 웅진, 사비를 도읍지로 하면서 멀리 중국과 일본까지 진출했던 극동의 강대국이었던 백제의 영광을 떠올려본다. 세월은 덧없다. 백마강에는 고란사와 낙화암, 조룡대가 남아 있지만 그 시절의 사람들은
- 포항 오어사의 대웅전에서 원효와 혜공. 찬란한 신라 불교의 역사에서 이적과 기행, 파계를 일삼았던 희대의 고승들이다. 두 사람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커다란 업적을 남긴 승려이다. 그가 지은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등은 한국 불교사의 커다란 성과이다. 반면에 혜공은 이렇다 할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지만 원효의 저술 활동에 깊게 관여한 흔적이 있다. 혹여 원효의 저서 속에 혜공의 철학과 사상이 용해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천진공의 집에서 여종의 아들로 태어난 혜공은 어릴 때부터 각종 이적을 일삼았다고 한다. 혜공은 천진공의 권유로 불가에 출가하였는데, 작은 절에 살면서 늘 삼태기를 지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스님을 사람들은 부궤화상으로 불렀으며 그가 사는 절은 부개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걸핏하면 우물 속에 들어가서 몇 달씩 기거하다가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몸이 하나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신령한 이적을 보인 그는 공중에 떠서 입적했으며 그의 사리는 수도 없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경북 포항의 운제산 자락에는 은린을 자랑하는 물고기들이
- 자연산 돌멍게의 환상적인 맛! 멍게는 참 흉측하게 생긴 수산물이다. 시뻘건 몸매에 작은 돌기 들이 톡톡 박혀 있는 모습은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맛은 또 어떤가. 잘 만난 멍게는 씁쓰레한 맛이 별로 나지 않지만 그렇고 그런 멍게를 만나면 뒷맛이 어딘가 모르게 시큼하다. 그래서 멍게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자연산 돌 멍게를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짭짤하면서도 단 맛이 나고, 시원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나는 것이 바로 자연산 돌 멍게이기 때문이다. 돌처럼 생긴 멍게를 반으로 톡 잘라서 노란빛깔로 이루어진 속살을 젓가락으로 직접 꺼내 먹는 맛은 가히 일품이다. 또한 속살을 꺼내 먹은 빈 껍질에 소주를 부어 마신다면 바다의 향이 담뿍 배인 소주 향에 절로 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자연산 돌멍게는 귀하면서도 고마운 식품이다. 우리가 흔히 멍게라고 부르는 우렁쉥이는 연안에서 생산되는 흔한 수산물이지만, 자연산 돌멍게는 남해안 지역에서도 일부 지역인 부산이나 여수, 혹은 제주도 등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품이다. 정식 명칭이 리테르개멍게인 자연산 돌멍게는 연안수심 3M 이상의 암반구조지역에 서식
- 백마강 나루터에 세워진 조각품들의 향연 백마강 달빛에 어린 구드래. 그 이름도 낯설은 구드래는 과연 어떤 곳일까? 구드래는 굿뜨래라고도 하는데, 부여에 있는 부소산 서쪽 기슭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갈 때,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에게 절을 하면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자온대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구드래 혹은 굿뜨래란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하는데, 방을 데우는 구들장을 뜻하는 것이다. 이 구드래는 백마강을 유람하는 황포돛단배의 선착장이 있는데, 이 선착장에서 황토돛배를 타고 백마강 일대의 고란사와 부소산성등을 둘러보는 코스가 있다. 외지에서 부여를 올 때, 처음 들르는 곳은 으례 구드래 공원이다. 즉, 구드래는 부여를 여행할 때 일종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인 셈이다. 구드래 공원에 가면 두 가지 볼거리가 있다. 하나는 나루터 근처에 모여 있는 이름난 식당이고, 또 하나는 너른 잔디밭에 설치된 조각품들이다. 부여라는 고적한 옛날 풍경에 현대적인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무척 이색적인 일이다. 구드래 조각공원에는 옛 백제인의 조각 기술을 이어받은 지역 출신 조각가의 작품 30점이 있
- 대표적인 부산인들의 토속 음식, 두투와 장어묵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자갈치 시장에 가면, 어머니는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좌판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키 작은 의자와 초라한 탁자가 있는 곳. 그곳에선 두투라 불리는 음식이 너저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두투와 반드시 함께 있는 것이 장어묵이라는 음식이었다. 우선 장어묵을 한 입 베어 무니 물컹하며 씹히는 맛이 너무 이상하다. 비릿하면서도 들큼한 맛이 절로 느껴진다. 순식간에 바닥에 뱉어낸다. 이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단 말인가. 장어묵에 속은 입맛은 슬며시 두투라 불리는 이상한 음식에 호기심이 동한다. 배가 고픈데, 저것은 조금 괜찮을라나. 젓가락으로 살짝 집어 먹어본다. 우우.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냄새. 아무런 맛도 없이 오도독 씹히는 맛. 도대체 이걸 어른들은 무슨 맛으로 먹을까? 그러나 옆에 앉은 중년의 사내들은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고 두투와 장어묵을 초장에 듬북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맛있게, 너무나도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이 신기하다. 내가 두투와 장어묵의 참맛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였다.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가끔 자갈치 곰장어를 먹으러 가다가 두투와 장어묵을
- 고대 한일 교류의 핵심인물, 무령왕을 생각하며 가루베 지온이란 몹쓸 일본인이 하나 있었다. 1927년에서 40년까지 공주고보에서 일본어 담당 교사로 일하면서 무려 1천기에 달하는 백제 고분을 제 멋대로 도굴한 위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고고학을 가장한 도굴업자요, 역사학자를 가장한 침탈자였다. 자신이 가르치는 조선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공주와 부여에 위치한 백제 고분들을 무단으로 도굴한 후, 그 부장품들을 깡그리 일본으로 밀반출한 가루베 지온. 우리에게는 철저히 응징하고픈 일본인의 전형이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단 한 번의 도굴도 없이 처녀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가루베가 눈에 쌍불을 켜고 찾아 헤맸던 무령왕릉은 그가 도굴한 송산리 6호분에서 불과 10m도 안 된 지점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로선 통탄한 일이지만 우리로선 정말 천만다행이랄 수밖에. 또 그가 죽은 지 1년 후에 왕릉이 발견된 것은 후안무치한 범죄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무령왕의 의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가루베 지온의 유족들에게 마지막 양심이 남아 있다면, 그네들이 신으로 떠받드
- 제11회 부산국제관광전을 다녀와서 흥겹다. 그리고 재미있다. 한 자리에서 세계 각국의 풍물과 풍경, 문화와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지난 9월 5일부터 9월 8일까지 열리는 부산 국제 관광전에 가면 이런 흥겨운 축제의 장을 만날 수 있다. 부산광역시가 주최하고 부산광역시관광협회와 (주)코프타가 공동주관하는 부산국제관광전은 우선 그 규모의 방대함과 참가 시민들의 열띤 호응이 이채로웠다. 이 행사의 취지는 관광산업 정보교류를 통한 지역 관광시장을 개발하고, 지구초 관광인사와의 만남을 통한 우의증진이라고 한다. 또한 건전 여행문화를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라고 한다. 행사장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과 연인들, 노인과 함께 온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인기를 끈 곳은 각 국의 음식을 맛 볼 수 있는 간이 음식점이었다. 일본음식과 태국 음식, 베트남과 남미의 음식을 즉석에서 조리하여 관람객들에게 판매하는 곳이었다. 또한 중앙 홀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중국과 남미, 아시아의 음악과 무용이 공연되어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관광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었다. 부산국제관광전에 가서 국내외 여타의
전통이란,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러니. 흔적이란, 흘러간 옛 시절의 올곧은 자취이러니. 올곧은 자취란, 낡은 툇마루 너머 피어나는 작은 연기이러니. 여기 영해평야를 앞에 하고 망월봉을 뒤로 한 괴시리 전통 마을에서 전통과 흔적, 그리고 올곧은 자취를 꿈결처럼 쳐다본다. 줄지어 선 고택들 사이에는 고요보다 더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세월의 흐름 따라 피어난 초록빛 이끼들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길에 아프도록 들어온다. 이상도 해라. 바닷가 근처의 마을 정경이 어찌하여 이토록 정겹단 말인가. 쳐다보고 또 쳐다봐도 괴시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토담을 따라 늘어 선 기와들은 아낌없이 고독을 발산하는데, 인적 드문 낯선 마을이 왜 이리도 포근하게 다가온단 말인가. 가만 가만 토담 옆에 난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본다. 황토 빛을 반사하는 흙길을 따라 가는 발걸음이 지극히 편편하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한 줄기 새하얀 연기. 아, 저거였군. 짙은 회색빛 사이로 새 하얗게 피어나는 굴뚝의 작은 연기. 그게 바로 이 정겨움의 본류였군. 여기에도, 200년의 세월을 음전하게 간직한 여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여말 선초의 대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목은 이색의 흔적이 고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란 도전과 응전의 반복’이라고 설파했다. 반면에 조선의 사학자이자 민족의 독립운동가, 혁명가였던 단재 신채호는 ‘역사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고 주장했다. 둘 다 인상적인 말이다. 전자는 문명 발전의 과정을 강조한 말이며, 후자는 민족 중심의 사관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단순히 민족 중심의 사관을 넘어서는, 감동적이면서 진리와 같은 말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중국과 일본이 발호하는 시기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가슴에 깊숙이 파고든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출생하여 언론인으로서 민족운동을 전개한 단재 선생은 애국계몽운동과 언론 운동, 잡지사 발행 등의 활동을 거쳐 민족사학에 눈을 뜨게 된다. 집안현의 고구려 고분을 답사하면서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인식에 천착한 선생은 이후 활발한 역사 저술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연맹 활동과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해 일제의 야만적인 폭압통치에 정당한 폭력투쟁으로 맞선 시대의 총아요 혁명가였다. 조선상고사는 선생이 1915년 북경에 체류하면서 저술한 것을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던 선생의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이 책은 1
- 환상과 꿈의 무대, 을 관람하다. 발레는 무척 난해한 예술이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면 발레도 무용의 한 분야에 지나지 않는다. 클래식은 좋은 음악으로 감상하면 되고, 발레는 인간의 몸짓으로 아름다움을 전달해주는 무용으로 느끼면 그만이다. 발레를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내용을 알고 가는 것이다. 몇 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내용을 갖고 있으며,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감상하면 한결 재미있고 쉽다. 지난 8월 23일과 24일, 양일간에 걸쳐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고전 발레극 은 환상적인 무대와 아름다운 무용을 부산 관객들에게 선보인 꿈의 무대였다. 국제신문이 부산시와 공동으로 주최한 이 발레극은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들이 출연한 역작이었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주목받은 인물은 알브레히트역을 맡은 발레리노 김용걸이었다. 부산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용걸은 동양인 최초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솔리스트가 된 세계적인 발레리노라고 한다. 부산에서 이런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탄생한 것은 우리 고장의 자랑이라고 할만하다. 또한 지젤역으로는 김주원과 윤혜진이 출연하였는데, 23일에는 윤혜진이 24일에는 김주원이 출연하였다. 김주원은 얼마 전에 발레리나로서는 드
인터넷을 설치한 지 넉 달 만에 무려 9번이나 수리를 받다니! 참으로 어이없고 화가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4월 말, 국내 모 통신사에 인터넷을 신청하여 사무실에 설치하였다. 전화도 패키지로 묶으면 더 싸다고 해서 전화도 함께 신청하였다. 그런데 한 달이 채 못 돼 갑자기 인터넷이 불통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생각하고 인터넷 통신사에 수리를 요청했는데, 고장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인터넷은 그 후로도 한 달에 2번 꼴로 불통이 되기 시작했다. 덩달아 전화도 불통되었는데, 한 번 수리를 요청하면 보통 3일 정도 걸렸으므로 9번 수리했으니 21일 정도 인터넷을 사용 못한 셈이 되었다. 기사가 올 때마다 짜증을 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9번이나 이런 꼴을 당하니 심사가 보통 뒤틀리는 게 아니었다. 모뎀도 벌써 4번째나 교체하고 케이블 선도 다시 깔고 해도 인터넷은 불통되었다. 결국 그 통신사에서는 자진해서 해약을 해주겠다고 했다. 다른 통신사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위약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인터넷 통신사들이 고객들에게 잘 고지하지 않는 일을 알게 되었다. 통신사 내부 규정에 의하
- 불교 무술의 대가, 양익스님의 흔적을 찾아 범어사는 부산 뿐 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불교계의 거대 사찰이다. 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가봤음직한 범어사는 수많은 전설을 가진 유서 깊은 절이다. 또한 절의 규모도 대단하여 부속 암자만 해도 수십 개에 이를 정도이다. 그런데 이 범어사가 거느리고 있는 부속 암자 중에서 그 분위기가 범어사와는 사뭇 다른 암자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범어사 청련암’이다. 푸를 청에 연꽃 연자. 푸른 연꽃이란 사찰의 이름부터가 어딘가 심상찮은 이곳. 먼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암자라고 하기엔 너무 큰 규모에 한 번 놀랄 것이다. 그리고 절 곳곳에 스며 있는 기묘한 선무도의 분위기 때문에 두 번 놀랄 것이다. 청호당 양익대사. 청련암의 주지 스님으로 계시다가 지난 2006년 5월에 좌탈입망하신 한국 불교 무술의 대가. 선무도로 알려져 있는 불교 무술의 원래 명칭은 '불교금강영관'이며 이는 부처님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적인 수행법이라고 한다. 이 수행법을 통해 작게는 심신의 안정을, 크게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불교무슬은 1960년대 들어 양익스님이 복구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