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6 (수)

  • 구름많음동두천 21.8℃
  • 구름조금강릉 23.2℃
  • 구름많음서울 21.7℃
  • 구름많음대전 24.6℃
  • 구름많음대구 23.7℃
  • 구름많음울산 21.2℃
  • 구름많음광주 24.6℃
  • 흐림부산 17.3℃
  • 구름많음고창 21.7℃
  • 흐림제주 24.0℃
  • 구름많음강화 19.4℃
  • 구름많음보은 22.3℃
  • 구름많음금산 24.5℃
  • 구름많음강진군 22.0℃
  • 구름많음경주시 25.4℃
  • 구름많음거제 17.9℃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문화·탐방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란 도전과 응전의 반복’이라고 설파했다. 반면에 조선의 사학자이자 민족의 독립운동가, 혁명가였던 단재 신채호는 ‘역사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고 주장했다. 둘 다 인상적인 말이다. 전자는 문명 발전의 과정을 강조한 말이며, 후자는 민족 중심의 사관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단순히 민족 중심의 사관을 넘어서는, 감동적이면서 진리와 같은 말이다. 특히 요즘과 같이 중국과 일본이 발호하는 시기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가슴에 깊숙이 파고든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출생하여 언론인으로서 민족운동을 전개한 단재 선생은 애국계몽운동과 언론 운동, 잡지사 발행 등의 활동을 거쳐 민족사학에 눈을 뜨게 된다. 집안현의 고구려 고분을 답사하면서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인식에 천착한 선생은 이후 활발한 역사 저술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연맹 활동과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해 일제의 야만적인 폭압통치에 정당한 폭력투쟁으로 맞선 시대의 총아요 혁명가였다.

조선상고사는 선생이 1915년 북경에 체류하면서 저술한 것을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던 선생의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이 책은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비로소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등장 자체가 한국의 역사학계에선 하나의 ‘혁명’이었다.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 총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상고사>는 한마디로 일제와 중국에 의해 왜곡된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민족주체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특히 단재가 주목한 것은 고조선 시대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치열한 관계였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단재는 철저히 실증사학을 주장하였다. 조선상고사를 읽어보면 여러 가지 고서가 등장한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한 후에, 고구려 땅을 당나라에 헌납하는 비굴한 방법으로 소위 <삼국통일>이라는 것을 달성했다. 이후 신라가 행한 첫 번째 행동은 백제와 고구려의 흔적을 철저히 말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 측 입장에 서서 조선의 상고사를 곡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서가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단재는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중국의 여러 역사서를 철저히 분석하여 문맥이나 자귀에 가엽게 남아 있는 고대 조선의 여러 흔적들을 파고 든 것이다.

조선 상고사에 보면 이런 선생의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한서나 신·구당서, 삼국지, 사마천의 사기, 식화지 등 중국의 역사서와 삼국유사,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을 비교 분석하면서 역사적 논리를 철저히 따진 것이다. 선생은 고대 역사서에 남아 있는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치밀하게 추적해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문헌만을 참고한 것이 아니었다.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관련 유물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는 지를 연구하기도 했다.

조선상고사가 위대한 첫째 이유는 김부식 이후 안정복에 이르는 사대주의 역사가들이 조선민족의 역사를 철저히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왜곡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또한 종래의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극동의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고구려 중심의 사관을 강조한 점이다.

한마디로 조선 상고사를 읽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사관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으며 식민지사관에 입각한 사고인지 알게 된다. 백제가 중국 땅에 광대한 식민지를 가졌다는 것이나 고구려가 당나라 장안성 근처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호쾌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또한 여진, 선비, 몽골, 흉노 등이 우리와 같은 ‘아(我)’이며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비아(非我)’로 규정하면서 조선의 고대사가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거대한 규모였음을 조선상고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조선상고사의 말미는 주로 삼국시대의 역사인데, 이 역사를 논하면서도 선생은 고구려의 위대성과 자주성을 설파하고 있다. 또한 신라가 연개소문의 대당 투쟁을 거부하면서 자국 중심의 소아병에 걸려 있었음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은 결코 통일전쟁이 아니었다. 중국의 대고구려, 대 한반도 침략 전쟁이 그 본질이며 민족 내부의 적으로서 등장한 것이 신라였던 것이다. 중국의 오랜 숙원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두 나라가 끊임없이 중국을 위협하고 중국 땅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국이 대한반도 침략전쟁을 감행했고, 그에 신라라는 비루한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호응한 것이다. 그 결과, 당나라는 고구려의 모든 영토를 차지했고, 신라는 백제 땅 일부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통일을 했다고 자국의 역사에 천박하게 기록한 것이다.

단재 선생의 위대성은 바로 단군을 재인식하고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신라, 고려, 조선, 현대의 사대주의 사가들에 의해 훼손된 우리의 사상, 우리의 문화를 복원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와 문화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 근거를 명징하게 증명한 것이다.

동아시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야욕으로 촉발된 역사 전쟁의 전운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단재가 있다. 우리의 역사를 민조주체적인 시각에서 명쾌하게 증명한 단재가 있으며, 단재가 신앙처럼 받드는 우리의 웅대한 역사가 있다. 결코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 북의 노래를 부르며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강조하셨던 단재 선생. 역사 전쟁이 바야흐로 전개되는 요즘, 단재 선생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