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문을 굳이 던질 필요는 없지만, 교직에 몸담고 있는 현장 교사로서 자꾸만 교육에 대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요즘 학생들을 보면서 지나간 세대에 대한 향수에서 나오는 어설픈 질문일까? 아니면 참된 교육자가 되고파서 자신이 정한 잣대에 교육이라는 단어를 꿰맞추기 때문일까?
이런 저런 향수가 시야를 스쳐가는 것은 그래도 교단을 지켜가는 가련한 한 교사로서의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양심의 소리가 멀어져 가고 옛 도덕이라는 틀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래도 교단에서만이라도 희미한 양심의 소리를 통한 양식있는 사고인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바른 교육자의 소신이 아닐까?
교육자는 바른 교육을 통해 바른 소리를 듣는데 있어야
“교육이 어렵다” “자식을 기르기 어렵다”라는 말을 말로만 들으면서 커 왔던 지난날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정작 교단은 누구의 소리에 의해 누구에게 소리를 전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언뜻언뜻 든다. 사실 현장 교사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다. 교사이기에 그리고 한 해 두 해 세월을 보내는 입장에서 교육이라는 단어를 새삼 되새겨 볼 수 있다는 것이 진정 교육자로서의 바른 길을 이제야 깨달고 있다라는 자책감에서 나온 연륜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사간은 끝없이 흐르고 흘러 자신의 눈 언저리가 조금씩 간지러움을 느끼는 것도 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난 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을 길러낸 부모들의 소리를 통해 교육이라는 단어를 회화적으로 그려내어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내는 상상속의 화가가 되고픈 생각도 선듯선듯 든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탕에서도 한겨울의 털옷을 입고 일을 하는 사람은 한여름의 뜨거움을 맛볼 수 없고, 한겨울에 한여름의 옷을 입고 일을 하는 사람은 한겨울의 매서움을 모른다. 교육도 이와 마찬가지다. 교육자는 교육을 시키려는 대상을 시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연륜을 지켜가면서 거기에서 쌓이는 노하우를 교사 자신의 교수 학습을 통해 지적 영역과 정의적 영역을 전수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이것에는 고정된 하나의 답이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른 교육을 통한 바른 인간의 소리를 표현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교육자의 양심은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하고, 진리를 전수받은 자는 곧은 진리에 따라 양심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가 비양심의 소리에 의해서 흔들리고 비양심이 진리로 둔갑하는 현실이 될 때는 허위를 가장해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어느 날 면죄부를 사기 위해 아우성칠 지도 모른다.
교실의 소리는 현실의 아우성 정화 역할
교실 교육은 과거를 통해 현실을 조명하고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점지해 간다. 그러기에 교실의 소리들은 현실의 아우성을 수용해서 정화시켜 새로운 미래의 장을 형성해 가야 한다. 참교육을 부르짖는 전교조나 교육의 정상화를 꾀하기 위해 모임을 형성하는 학부모 연대도 모두 교육에 양심의 소리를 형성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양심의 소리를 학교에서나 교실에서나 찾아내기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