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오리가 희푸른 파도를 밟으며 날아오르는 곳.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로 지내다가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자를 푸른 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300년 전 조선 영조 때, 한양에서 이조참의(현 내무부 국장급, 문관의 선임과 공훈봉작을 맡았음)란 벼슬을 지내다가 졸지에 기장현감으로 좌천된 권적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암행어사인 ‘박문수’의 호남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임금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벌로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강등되고 말았다고 한다. 한양에서 떵떵거리는 고관대작 생활을 하다가 동해 남단의 보잘 것 없는 마을에 사또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울분과 서러움에 휩싸였겠는가.

권적은 기장 현감으로 좌천된 후, 답답한 소회를 달래기 위해 원앙대라는 빼어난 절경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원앙대는 기장군 동암리 남쪽해변에 있는 암석지대를 말하는데, 당시 그는 기장읍 교리 출신의 신오라는 사람과 사귀면서 늘 이곳에 놀러 왔다고 한다. 요새말로 하면 서울의 중앙관서에서 잘 나가는 고급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촌구석으로 발령받자 공무는 제쳐놓고 친구와 더불어 경치 좋은 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때웠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 또한 무척 낭만적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비오리가 많았다고 하는데, 높직한 암대 위에 서서 멀리 바다를 쳐다보면 비오리들이 대 아래 출렁이는 희푸른 파도를 탈듯 말듯 하다가 일시에 큰 무리를 지어 까마귀 떼처럼 날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비오포(飛烏浦)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이 ‘비오리’라는 오리과의 물새는 자줏빛이 찬란한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암수가 함께 노는 새라고 한다. 결국 비오리는 바다의 원앙새라고 할 수 있으니,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적이 이곳의 큰 바위에다 ‘시랑대’란 글씨와 위의 시조를 각자한 후로, 이곳은 원앙대가 아닌 시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랑’이란 판서에 버금가는 벼슬로서 권적은 그의 예전 벼슬인 이조참의를 판서 직에 버금가는 계급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자신의 노골적인 출세 욕구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어쨌든 권적의 엘리트주의적인 개명이 눈에 거슬리긴 하나, 시랑대는 동해남단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경치를 가진 곳임에 틀림없었다. 파도가 흰 거품을 내며 밀려와서 암대의 칼 같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오색무지개 색깔을 띤 비오리가 춤추듯 날아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환상적이었겠는가. 또한 노송 우거진 절벽과 고요한 바다를 비추는 달빛을 보면 이곳이 과연 인간세상인가 절로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면, 멀리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해동국의 시랑대를 보고 죽으면 원이 없다고 했을까.
권적의 시조 각자 후로, 시랑대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랑대를 운자로 한 시조가 수도 없이 새겨졌다고 하였다. 기장현감 윤학동의 시와 김후 육천민의 시도 각자되어 있었고, 차성가라는 시조도 있었으며, 고종 연간에는 홍문관 교리 손경현이 남긴 시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월천선생(1714∼1786)은 <시랑대기>라는 글에서 시랑대의 절경을 구구절절이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시랑대에는 어느 스님과 용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동해 용왕의 딸과 스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설과 빼어난 풍광을 지닌 시랑대는 지난 1960년대만 해도 수많은 한시 가 새겨진 절경의 바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세월의 풍파에 못 이겨 이 절경의 바위들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또한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이 바위들이 발파를 당해, 지금은 그 예전의 풍광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라고 하니 그 서글픈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