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청마의 친일 논란을 지켜보며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많은 다른 문인들의 친일 작품을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통탄스러움을 가졌었지만 최근 청마의 몇 작품을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며 그 어느 때보다 더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옥에도 티가 있다 하는데 확실하지 않은 것을 꼭 이렇게 들추어 내어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고 삭막하게 만들어야 하는 건지?
최근에 일제 말 신문에 게재된 짧은 산문 한 편이 또 이 논쟁을 더욱 가열시키고 있다. 물론 추호도 친일행각, 친일작품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민중의 지도자로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문인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위해,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모든 역량을 다 동원했어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고 중차대한 책무였다.
그러나 그분들의 친일을 논함에 있어 문학적 업적까지 말살하려는 최근의 일련의 움직임은 신중을 요하는 일로 여겨진다. 미당의 경우 일부 작품에 친일 행각이 확연한 것이 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을 면밀히 조명하여 깊은 이해와 관용으로 바라보면 민족어의 보고요, 민족정신의 정수요, 아름다운 민족서정이 근간을 이루는 그 분의 작품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야 할 당위성도 또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처한 그 시대상황을 슬퍼해야지 그런 시대적 기류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못한 문인을 일방적으로 호되게 질책만 하는 것은 그 시인 작가 분을 위해서도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서도 심히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국민 중에 미당의 시를 읽지 않고 그 서정에 가슴 설레며 청소년기를 보내지 않은 분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 아름다운 언어에 매혹되어 사랑을 앓고 인생을 설계하며 미래의 꿈을 키워왔던 수많은 국민들이 무차별적으로 몽둥이를 맞는 그 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그분들의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불온한 어떤 행위에 가담한 것처럼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분들의 작품은 이미 내 피에 혼에 스며들어 내 안에서 이미 아름다운 서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들을 철저하게 매도하여 전면 부인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온 국민에게 가혹한 폭력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청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마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작품을 접하며 그의 사상과 정서를 온 마음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인 흠모하던 시인 중 한 분이다. 그 분의 사랑 얘기에 가슴이 뛰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자 연인, 길이 길이 인구에 회자되어야 할 서정과 사랑의 시인이 아니겠는가.
조각글 하나 발견했다고 코페르니쿠스적 대발견을 한 듯 호들갑을 떠는 그 저의는 무엇인가. 그로써 그것이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가 되고 가시지 않는 시퍼런 멍으로 남게 되는 것을 생각이라도 해보았는가. 친일적 요소가 있는 작품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다른 작품이 치명적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의 정신은 그 상황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할 소지가 있는 유동적익고 가변적인 것 아닌가. 친일작품이 민족의 문학에서 영원히 소멸되고 자취를 감추어야 할 중대한 범죄행위요, 민족배반 행위라 할지라도 이제 인류 정신사적 입장에서 작품을 조명할 필요도 있다. 그분들이 왜 그런 작품을 써야만 했는지 그 배경에 대한 연구도 절실하다.
당시 상황에서 국민 대다수가 창씨개명을 하고 내선일체라는 그들의 선동에 저항도 할 수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시인 작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당의 자전적 시집 '팔할이 바람'을 보면 그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이었음을 솔직히 자술하고 있다. 독립은 실현될 기미조차 없고 내선일체로 민족의 향방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국민 대다수가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큰 역사의 물줄기, 억압적인 분위기 아래서 '왜, 당신은 문인으로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작품을 쓰지 않았느냐?'고 총부리를 겨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 역사적 상황은 개인에게도 비극이고 민족에게도 비극이었다. 무참하게 처단하여 친일의 행위를 역사에서 철저하게 응징하는 방법도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가 어찌 한 가지 틀에서만 존재할 것인가. 무수히 많은 인간사가 다 시적 제재가 되고 소재가 된다면 그분들이 추구하던 진정한 시정신이 친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금세 알 것이다.
그분들의 과오는 과오로써 지적해야 옳겠지만 그들에게 지나치게 혐의를 씌워 아름다운 시정신을 마구 훼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모두의 큰 손실이 되고 비극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또 다른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될 것이다.
미당의 문학관은 소중하게 관리되어 후손들이 길이길이 그 시를 접하고 감동해야 할 것이고, 청마문학관도, 청마우체국도 소중하게 보존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 청마를 기념하여 개최되는 편지쓰기 대회도 아름다운 행사로 해마다 이어져야 할 것이다. 옛 말에 '빈대 잡는다고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도 있다. 서양 속담에도 '화재가 무서우면 부억에도 들어가지 말라'는 말도 있다.
우리가 그분들의 행적을 한번 짚어보고 반성의 계기로 삼는 것은 좋되 모든 행사를 중단하고 그분들을 철저하게 매도하여 국민들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한국문학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예수는 누구라도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예수의 으뜸제자도 예수를 세 번씩이나 배반하지 않았던가. 과오가 과오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발전의 계기가 되려면 때로는 따뜻한 시선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