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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무릎 탁 칠 교육 정책’이 등급제 폐지인가

누가 뭐라해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건설 분야의 전문가다. 현대건설 사원 시절부터 국내외 건설 현장에서 쌓았던 경험을 서울 시정에 반영하여 당시 반대 여론이 들끓던 청계천을 서울의 명물로 탄생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 당선자의 핵심 공약인 대운하도 철저한 준비를 거쳐 추진하되 결코 서두르지 않고 반대론자들의 주장까지 폭넓게 수용하면서 진행하겠다고 예의 전문가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건설 분야보다도 훨씬 더 신중해야할 교육 정책이 너무 안이하게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걱정이 앞선다. 전문가다운 식견을 갖고 있는 대운하와 관련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비교적 낯선 분야라 할 수 있는 교육과 관련해서는 자신감이 앞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당선인은 연초 대학 총장들의 모임인 대교협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입시를 대학 자율에 맡기려 한다.”며 자율화의 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대학에 입시 자유를 줘도 본고사는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은 뒤 “일부 전형에서 논술시험을 없앤 모 대학에 수많은 우수학생이 몰려와 ‘대박’이 터졌다”는 말까지 했다.

문제는 이 당선자의 몇 마디 말에 인수위원회가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신중하고 또 다양한 의견 수렴이 필요한 대입 제도를 공청회 한 번 없이 떡 주무르듯 하고 있다. 입시 제도는 그 특성상 교육 활동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또한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이해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교육 정책은 반드시 상대적인 불만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가능한 변수를 따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인수위원회는 시행 1년만에 사실상 수능등급제 폐지를 결정했다. 수능 성적표에 기존의 등급과 함께 표준 점수와 석차 백분율을 함께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등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무실해진다는 점에서 보면 폐지나 다름없다. 여론에 떠밀린 듯 수능등급제의 장․단점은 미처 논의할 겨를도 없었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입시를 불과 수 개월여 넘겨놓은 시점에서 제도를 바꾸는 것이 교육 현장에 얼마나 도움이 될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예비 고3 교실은 카오스 상태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수능등급제를 전제로 계획을 세워 학습에 매진했던 학생들은 변화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난감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간 수능등급제 시행에 따라 상대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내신 때문에 학교 수업에 적극적이었던 학생들도 수능의 비중이 높아짐으로써 학원을 거거나 과외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중․상위권 대학들이 한 줄로 세운 수능 성적을 두고 굳이 내신을 전형 자료로 활용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수위원회의 수능등급제 보완책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며칠전 대교협 입학처장단 회의에서 수능등급제에 맞춰 공부한 학생들을 고려하여 2010학년도 이후부터 등급제 폐지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반면에 수험생들이 몰리는 고대, 서강대 등 서울 지역 7개 사립대학이 2009학년도부터 당장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용한 셈이 되었다. 이는 인수위원회가 다수 대학과 교육 현장의 의견보다는 우수 학생 선점 경쟁에 나선 일부 사립대학의 손을 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집을 짓거나 댐을 만드는 건설 공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육은 개인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가를 중차대한 과업이기에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고 또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쳐 정책을 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권은 5년이면 바뀌지만 교육은 500년 아니 그 이상 계속될 국가의 운명이나 다름없다. 정권이 바뀐다고 교육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수위는 수능등급제 폐지가 과연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현장 교사들이 무릎을 탁 칠만한 정책인지 다시 한번 곱씹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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