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관거리에 흐르는 중국의 향기를 찾아
그 거리에는 붉은 색감이 넘쳐 흐른다. 하늘을 보아도 붉은 색이요, 땅을 보아도 붉은 색이다. 거리의 상점들에서도 붉은 색감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 붉은 색감을 보면서 감동적인 영화 한편을 떠올린다. 지난 1989년 장예모가 메가폰을 잡고 공리와 강문이 열정적인 연기를 펼쳤던 ‘붉은 수수밭’이 그것이다. 당신들이 진정 사내라면 이 술을 먹고 동족의 원수를 갚아달라며 절규하던 주인공 추알의 얼굴에는 수수밭에서 피어오른 붉은 빛깔이 잔잔하게 스며 있었다.

부산역 맞은 편 남쪽에 자리 잡은 상해의 거리. 일명 청관거리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부산의 차이나타운이자 중국인의 거리이다. 이 거리의 큰 길 중앙로에는 지난 1999년 부산시와 상해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인연으로 세운 ‘상해의 문’이 역시 붉은 색감을 온 몸에 두른 채 지나가는 이방인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다. 석양이 질 무렵이면 그 문에 드리운 황금빛 장식물이 국화꽃 색깔을 지상에 내린다. 120여 년 전 이곳을 점유했던 청국인들의 영화를 그리워하면서.
당시 부산역 앞은 백사청송이 해풍 속에서 은근하게 나부끼던 한적한 해안가였다. 그리고 그 해안가에는 후손을 알 수 없는 무덤들이 누 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외로운 군상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먹고 먹히는 열강의 시대에 힘없는 조선의 백성들은 청국과 일본국의 위세에 짓눌려 있었다. 청국인들이 몰려와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일본인들이 몰려와서 그들을 수탈했다. 그들은 남의 나라를 제 땅 인양 여기까지가 자기네 땅이고 저기까지가 너희들 땅이라고 선을 죽죽 그었다.

이렇듯 청관거리에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설움이 배어 있었다. 임금의 아버지를 무단으로 납치할 만큼 중국인들은 오만방자했다. 덩달아 이 청관거리에서 각종 비단이며 포목, 양복지, 거울, 꽃신 등을 팔던 중국 상인들의 횡포는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구경만 하고 가는 조선 백성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으며 본국에서 팔던 가격의 열배 이상을 조선인들에게 강요하기 일쑤였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청국 상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위세에 짓눌려 이 거리에서 독점하던 상권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 이 거리에서 형성한 문화와 민족적 동질감은 굳게 작용하여 청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광복 후 이 거리에 터를 잡은 중국인들은 작고도 귀여운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였고 화교 소학교와 중, 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들 중 더러는 재력을 쌓아 미국과 캐나다 등지로 이민을 가기도 했지만 남은 이들은 청요리집을 경영하거나 소규모 가게를 열었다.

세계에서 화교가 가장 성공하지 못하는 나라로는 단연 우리나라가 꼽힌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화교에 대한 제약이 아주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교들이 주로 하는 것은 중국요리집이나 재료상, 무역업 등이 고작이라고 한다. 이 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화교가 경영하는 가게가 즐비하다. 중국 요리 집도 있고, 만두와 공갈빵을 파는 가게도 있다.
세월이 흘러 이들 중에서는 약사와 한의사 등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이 청관거리 서편 언덕바지에는 충요촌이라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은 중국 산동성 화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국이 공산화되자 대만국적으로 망명한 정치난민들 출신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인천과 서울에 살던 화교들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형성된 마을인 것이다. 이 충효촌은 지난 2005년 당국의 도움으로 주택조합을 결성하여 아파트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 마을의 자녀들이 외지에서 살다가도 부모들을 찾아 자주 이곳으로 온다고 해서 충효촌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동에는 상해문이 있고, 서쪽에는 동화문, 남쪽에는 남해문이 있는 거리. 그리고 북쪽에는 북해문이 중국 특유의 붉은 빛깔을 뽐내는 청관거리. 그 청관 거리에 무심히 서서 오가는 러시아인과 중국인, 그리고 동남아시아인들을 쳐다본다. 이들도 이 거리의 이방인에 불과할 터, 다시 먼 후일에 어떤 이방인들이 이 거리를 지나갈까. 상해거리에 피어난 붉은 색감이 거리를 황홀하게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