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내가 스승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으니, 다만 '스승'은 바라볼 '이상'으로 가슴에 새기고 살고자 할뿐입니다. 스승은 너무 높아서 내 생각으로는 '선생님의 날'이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스승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요. 늘 그 자리에 서서 말없는 스승으로 온 세상을 지키며 빛나는 태양에서 시작해서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5월의 향기를 더해주는 아카시나무 아래에서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꽃을 피운 민들레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얻게하는 모든 생명체는 이미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턴지 '스승의 날'은 매맞는 날이 되어서 그날이 오기 전부터 조마조마한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상공간에서는 최고의 선생님과 최악의 선생님을 드러내놓고 겨루며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는 풍경이 며칠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분노한 누리꾼이 있는가하면 가슴절절한 사연을 올려놓고 그리워하는 애틋한 사연도 있습니다. 뼈아픈 사연 앞에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부끄러운 자성을 하고, 감동적인 글 앞에서는 나도 그렇게 해야 함을 다짐하곤 합니다.
또 한구석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스승의 날에 단식투쟁을 하시는 동료선생님들의 사연을 접하며 동참하지 못하는 죄송함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즐겁기보다는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지요. 옛 스승에게 사람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온 죄스런 마음이 더 깊은 스승의 날은 마치 어버이날처럼 가신 부모님을 그리듯 마음 아픈 날입니다.
나는 그런 우울함을 떨쳐내기 위해서 우리 2학년 다섯 아이들과 작은 이벤트를 벌였답니다. 다른 날보다 5분쯤 늦게 들어섰더니 우리 반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서 선물을 내밀었습니다. 얼른 보니 부모님들이 준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미리 스승의 날을 말한 적도 없고 부담 갖지 마시라고 일부러 언급하는 것도 어색해서 편지를 보내지 않은 내 잘못을 반성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며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해온 아침독서마저 팽개치고 나를 졸랐습니다.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열어보라며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아이들 성화에 못이겨 함께 열어보고 고마움과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선물들은 스타킹, 녹차, 비타민, 건강음료였습니다. 조손가정인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봐 조심하고 있는데,
"어제 00는 수학을 100점 받았고 받아쓰기도 참 잘 했거든? 열심히 공부하고 착한 어린이가 되는 것은 선생님이 최고로 좋아하는 선물인데?" 그러자 00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선생님은 책도 많고 옷도 많고 뭐든지 다 있어요. 선생님 건강을 걱정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다음에는 이런 선물 하려고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착하고 바르게 자라며 숙제를 잘 하는 것이 바로 최고의 선물이랍니다. 요즈음 00가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칭찬하셔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오늘은 작년 1학년 때 여러분을 가르치시느라 고생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하는 날이랍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선생님께 감사하는 편지도 쓰고 선생님 얼굴도 그리면 참 좋겠어요."
"야! 신난다. 선생님, 종이 주세요." 편지지는 컴퓨터로 만들고 모양 가위로 도화지를 오려서 작년 선생님 얼굴을 그리는 아이들은 아주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예쁜 소녀로 그린 아이, 공주처럼 그린 아이, 삐삐머리를 그린 아이까지도 모두 사랑을 담았습니다. 5명의 아이들이 한 줄로 서서 선생님 교실로 가서 줄줄이 사랑의 편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림을 들고가서 "선생님 사랑해요"를 외치며 선생님을 안아드리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악수만 하고 왔습니다. 안아드리지 못하면 교실에 못 들어온다고 엄포를 놓으며 다시 보내놓고 몰래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에게 안긴 선생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표정을 웃으시는데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다고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을 반복하며 구경하는 나도 같이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풍경, 행복한 눈물을 보았습니다.
물질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감동받고 행복해질 수 있음을 간과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마음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을 전할 수 있는데 오해를 하고 삽니다. 4명의 부모님이 내 선물을 준비하려고 마음 쓰신 게 참 미안했습니다. 스승의 날을 맞아 더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하겠노라고 준비해 간 편지와 책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보내며 나도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승의 날이 물질로 얼룩져서 그 본래의 숭고한 뜻이 변질되지 않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제자를 더욱 사랑하고자 다짐하는 날이어야 하고 지난 날의 선생님을 잊지 않고 그리는 마음을 반추해내는 날이어야 함을 생각합니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아름답게 만나는 날로 기억되기를 빌어봅니다. 곱게 주름진 얼굴 위로 행복한 눈물을 흘리시던 선배 선생님처럼 내년에는 나도 그렇게 행복하게 울고 싶어집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은 얼마든지 긍정적이고 바르게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색안경을 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어린이 날'이어야 하고 '스승의 날'이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자고 만든 날입니다. 한 어린이도 상처 받아서는 안 되고 어떤 선생님도 다치지 않아야 합니다.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누렇게 빛바랜 편지를 보며 지금도 그 아이들을 그리며 행복한 스승의 날입니다. 편지보다 더 오래 가는 사랑, 위대한 표현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