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보충수업 첫날, 몇 명의 아이들을 제외한 아이들 대부분이 출석하였다. 그리고 1차 수시모집에 지원한 아이들의 경우, 최종 경쟁률을 확인하고 난 뒤 보충수업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내신 성적이 우수한 몇 명의 아이들은 높은 경쟁률과 관계없이 수시모집에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23일 수시모집 마감결과, 생각보다 경쟁률이 높아 그 누구 하나 합격을 장담하기가 어려워졌다. 경쟁률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던 아이들까지도 다소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원서를 작성하기 전에 경쟁률이 높아 합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 두었지만, 대부분 아이들은 실제 경쟁률에 놀라운 눈치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합격하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불합격을 했을 경우, 방학 보충 불참으로 생긴 수업결손을 어떻게 보충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짐작하건대 불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2차 수시모집이나 나아가 대학수학능력시험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수시 모집에 지원한 아이들에게 방학 보충수업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주문하였다.
최근 1차 수시 원서를 작성하는 며칠 동안, 왠지 모르게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예전보다 많이 해이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라도 수시모집을 쓰는 아이들 때문에 그렇지 않은 아이들까지 선의의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다. 요즘 들어 아이들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합격증을 손에 쥘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런데 1차 수시모집에 꼭 지원을 하겠다던 한 녀석이 연일 결석을 하여 걱정이 되었다. 녀석은 ○○대학 간호과에 가는 것이 꿈이라며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 대학에 꼭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담임인 내게 부탁을 하곤 했었다. 방학 전날, 녀석은 그 대학의 접수 마감일과 제출서류가 무엇인지 꼼꼼히 챙기는 열성까지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심 녀석이 꼭 대학에 합격하기만을 빌었다.
접수 마감일(23일). 녀석은 학교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방학 날 접수 날짜와 시간(오후 5시)을 두 번이나 일러주며 꼭 원서접수를 하라고 다짐을 했기에 녀석의 결석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원서 접수 마감시간 1시간 전, 녀석의 접수 여부를 알아보려고 대학에 전화를 했다. 확인 결과, 아직 녀석의 이름으로 접수된 원서는 없다고 하였다. 아직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았기에 녀석이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녀석이 지원하고자 한 학과의 경쟁률이 그렇게 높지 않아 다행이었다. 운이 좋으면 녀석이 합격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최종 마감결과 경쟁률이 2대 1이 조금 웃돌았다. 전년도 입시결과로 보아 지금 녀석의 성적은 합격안정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쪼록 녀석이 합격하여 자신의 꿈을 꼭 이루기를 원했다. 합격하여 좋아할 녀석을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사내 녀석이 간호사 가운을 입고 주사를 놓는다고 생각하니 벌써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나의 웃음을 멎게 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폴더를 열자, 휴대전화 액정 위에 찍힌 전화번호가 낯설었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잠깐의 휴지(休止)가 지났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잘못 걸러온 전화로 생각하여 끊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선생님, 저 ○○입니다. 죄송합니다."
녀석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연거푸 ‘죄송하다’라는 말만 했다. 무엇보다 원서 접수가 궁금해서 물었다.
"원서는?" "접수 못 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녀석이 뒷말을 잇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궁금증이 더욱 커져만 갔다. 걸려온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수신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녀석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녀석의 친한 친구로부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접수 마지막 날 간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결국 원서접수를 못 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간호사란 직업은 남자가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며 전형료조차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녀석이 접수 마지막 날까지 아버지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녀석은 원하던 학과에 원서 한번 넣어보지 못하고 1차 수시모집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녀석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2차 수시모집이 시작되기 전에 그 아이의 아버지를 직접 만나 설득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먼 훗날 백의 천사가 된 녀석을 보면 아버지 또한 지금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