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스스로 삶을 마감한 연예인 자살 소식이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같은 날 지방에서도 생활고를 비관한 어머니가 자식들을 앞세우고 삶을 마감했다. 나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 안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한 인간으로서 비통하고 가엾기 짝이 없다. 나도 언젠가는 가야할 정해진 죽음의 길이지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경찰청 통계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자살한 사람은 1만 3407명으로 하루에 36.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1.5명(2006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고 평균(11.2명)의 두 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특히 자살 예방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예산도 연간 5억원뿐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 누군가는 슬프게 세상을 마감하고 있음을 통계가 일러주는 현실. 자살과 관련된 소식을 매체를 통해서 날마다 접하면서 사는 지금, 우리는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워진다. 더구나 청소년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연예인들의 죽음을 앞 다투어 보도하는 텔레비전과 신문을 비롯한 언론 매체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의 죽음 소식을 어느 정도 미화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라거나 `우울증을 앓았다`거나 개인적인 가족사에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듯한 취재 보도 등을 여과 없이 내보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몇 해 전 언론의 자살 보도에 관한 원칙을 발표했다. ‘잘못된 보도 행태가 모방 자살,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유명인의 자살은 될수록 지면과 단수를 최소화하라. 주검과 현장, 자살 수단의 사진을 싣지 마라. 복잡한 자살의 동기를 단순화하거나, 고통에 대처하는 선택이나 해결책인 것처럼 표현하지 마라. ‘라고.
일본은 학교 수업 시간에 죽음 준비 교육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일부 단체, 죽음학 연구자들만이 이 문제에 맞서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국민 중 35%가 자살을 생각해 본 적 있고 3.7%인 134만 명이 시도해 본 적이 있다는 한국에서 몇 초짜리 ‘자살예방 공익광고’ 정도로 죽음을 부르는 사람들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제는 가정과 학교에서 삶의 자세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문제를 교육과정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고통과 번민,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놓아버리는 죽음의 선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거나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최근에도 초등학생이 부모의 꾸지람을 듣고 자살한다거나 자살사이트가 범람하는 무서운 세상에 우리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삶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와 같은 삶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근본적인 물음을 제공한다. 유감스럽게도 삶의 문제를 명쾌하게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죽음 역시도 그러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좋은 의미로 본다면 삶은 부모로부터,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선사받은 축복이며, 때로는 원치 않은 출생일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운명적으로 받은 것이니 불가항력이다.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없었으니 죽음도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선택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으며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며칠 전 생을 마감한 연예인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고 절망적인 기분은 내내 내 마음을 잡고 어두운 감정으로 슬픈 감정으로 내몰았다. 아들 같은 그가, 제자 같은 그가 그렇게 삶을 훌훌 버리는 현실 앞에서 하루 종일 몇 번이나 긴 한숨이 나왔다. 사후세계를 알 수 없으나 죽음을 선택한 그가 그 곳에서는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와 가족이 당하는 엄청난 고통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통한의 슬픔으로 남아 시시때때로 절망을 안겨 주리라. 특히 생명을 내어준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리라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사랑하는 아내의 비통한 슬픔, 지인들이 겪어야 할 슬픈 시간들을 단 한번만이라도 간절하게 배려해 주었다면 그렇게 모진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그 힘든 시간을 홀로 먼 길 떠나며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까? 특히 가족들에게는 죄의식까지 안겨주어 오래도록 힘들게 하며 심지어 가족이 분열되는 경우까지 생긴다고 한다.
이제는 잘 사는 법만 가르칠 일이 아니다. 난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함을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전개되는 어려움을 이기는 법, 시험에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서는 프로그램, 힘들 때 찾아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인생의 멘토나 단체 등.
나는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 서울에 올라가서 남의 집에서 일을 하며 자정을 넘어서는 혼자서 공부를 하며 주경야독의 삶을 살았다. 가정 형편으로 자식을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해하시던 아버지는 내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시며 다독여 주시곤 하셨다. 그 아버지도 한 때는 생활고와 병마로 삶을 포기하려 했지만 하나뿐인 나를 두고 먼 길을 떠날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삶을 선택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죽고자하는 마음으로 삶을 선택한 아버지의 피눈물이 지켜준 내 생명을 소중히 하며 삶을 조심스럽게 살고자 했다. 절망 가운데서도 자식을 보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켜낸 아버지의 삶을 늘 아파할 수 있었다.그러기에 나는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가난했던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자신들이 누리지 못한 윤택한 삶과 행복한 삶의 기회를 자식들에게는 원 없이 주고 싶어 하는 보상심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할 수만 있다면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과잉보호는 자녀들의 우산이 되어 나약한 젊은이들을 양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마음을 강하게 키우는 교육, 체력을 단련시키는 교육 프로그램이 가정과 학교에서 절실한 때이다. 넘어질 때마다 부모가 달려가서 일으켜 세워주는 교육 방법으로는 스스로 일어서는 훈련을 쌓을 수 없다.
인터넷의 발달,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체의 발달은 실시간으로 아이들과 청소년들 사이에 긍정적인 소식과 함께 부정적인 뉴스도 같이 전달된다. 질문이 많은 우리 반 아이들이 그 소식을 물어볼까봐 조심스럽다. 초등학교 2학년이라 하더라도 어른들의 입에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그런 소식에는 아주 민감하다. 당장 우리 반 아이들에게 심각하게 교육을 시켜야겠다. `부모는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사 낳아놓기만 하고 기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어버이를 양어깨에 매고 수미산(불가에서 가장 높다는 산)을 오르내리며 어깨뼈가 다 드러나 닳아져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가르치면 아이들도 금방 숙연해진다.
그러니 자살 예방 교육은 곧 `효`에서 시작하여 `효`로 마무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 방법보다 감성에 호소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교육 방법으로 시작하고 보다 전문적인 교육프로그램을 교육과정에 접목시켜야겠다. 현대의 지식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현실에 적응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능가하는 미래를 준비하는 적극적인 지식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귀한 세상이다. 청소년들이 자살의 유혹에 무방비 상태이다. 젊은이들이 살아남기 힘든 현대사회이다. 일자리가 귀하고 좌절하기 쉬우며 병들기 쉬운 사회 풍조가 그들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 적극적인 자살 예방교육 프로그램이 절실한 때이다. 죽음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자신의 생명과 삶을 선택할 수 없듯이.
삶과 죽음에 관한 탄력적인 교육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단계이니 ‘아름다운 죽음’이 생명을 받은 인간의 소망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웰빙’의 단계를 지나 ‘웰다잉’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웰빙을 가르치는 지식과 책들은 온 세상에 넘쳐난다. 건강하게 잘 먹고 살기, 부를 축적하여 남들보다 잘 살기를 가르쳐주는 지식은 날마다 넘쳐난다. 거의 모든 매체와 책들이 경제와 성공, 명예와 외모와 같이 눈에 보이는 물질의 우상 앞으로 달려가게 한다. 삶을 가르치는 과목과 교육과정은 있어도 죽음의 문제를 가르치는 과목은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 어디서나 삶의 그림자로 내 곁에 서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애써 외면하고 사는 우리들이다. 갑자기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여 원치 않는 저 세상으로 간다. 살기 위해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간절한 삶을 한 순간에 내려놓으며 자신과 가족,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슬픔까지 안겨주는 자살 소식을 최소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죽은 뒤에 모든 것이 끝난다면 힘든 삶을 포기하기가 쉬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괴테도 영혼의 불멸을 말한다. “죽음이란 해가 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눈으로부터 벗어나 볼 수 없게 되더라도 태양은 지평선을 향해 조금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 우리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 존재한다. ” 데레사 수녀도 “죽음은 삶의 계속이고 완성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지상에서 형체만 없어질 뿐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새겨지고 좋거나 나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사후세계를 모른다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누군가 미리 가 본 적이 없다하여 현재의 삶을 대충 살거나 무책임하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할 수 있는 한 살려고 노력하며 몸부림은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오죽하면 고통을 잊기 위해 막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그 누구도 탓할 수는 없지만, 남기고 간 상처의 폐해는 너무나 심각하다. 가족이나 친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변의 여섯 명이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약 8만여 명씩 자살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하니 국가적으로 제도적으로 자살예방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어느 한 단체나 학자, 연구소에서 캠페인을 벌이듯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초등학교에서부터 삶의 문제를 다루듯 죽음의 문제를 발달 단계에 맞게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성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듯, 학교 폭력 프로그램을 시작하듯, 독도 문제에 대처하듯 이제라도 빨리 자살예방 프로그램이 교육과정 속에 들어와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초고속으로 변하는 현대사회의 특징에 발맞추어 새로운 교육과정도 탄력적으로 운영되어야 함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 출생을 기뻐하듯 죽음도 슬퍼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함을 생각한다. 석양의 아름다운 노을 볼 때마다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잘 살아야 함을 생각하곤 한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선택한 사람은 없다. 내 삶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죽음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生命이다!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생존권은 있으나 죽음의 권리는 없다. 다만 인간답게 죽을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는 만 대 이상의 조상의 피를 받아 내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받은 생명도 그렇게 생명으로 이어줄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제 국가는 경제문제보다 더 앞서서 자살로부터 가정과 사회를 지킬 수 있는 구조적인 장치를 해줘야 한다. 어느 나라보다 앞선 자살비율을 낮추는데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생명 보존만큼, 인간존엄만큼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가? 경쟁과 경제, 초고속 성장과 개발의 길 위에서 함께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진 곳곳에서 신음하는 목소리가 자신을 죽이는 최악의 선택으로, 침묵하는 슬픈 사람들의 어깨를 다독일 줄 아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다 함께 잘 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자살만은 막을 수 있는 안전망을 설치할 책임이 국가에게 있다.
지금 당장 학자들을 모으고 실태를 파악하여 예산을 세우고 어둠 속에서 혼자 그 무서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구할 그물을 짜야 한다. 특히 교육에 투자해야 한다. 특정교육에 투자하는 예산보다 먼저 생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긴급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체계적으로 가르칠 인프라를 구축하여 아이들을 구하고 청소년을 구해야 어른이 되어서도 탄탄한 웰빙이 가능하다. 체계적인 자살예방 프로그램을 교육과정에 도입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도, 정부도, 사회단체도, 학자도 머리를 맞댈 때이다.
자살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 땅엔 슬픈 에너지가 흐른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올림픽의 인간승리를 보면서 기쁨의 에너지가 온 대지를 넘치던 것처럼. 세상에 슬픈 사람들이 적어지기를 빌며,나의 졸필이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희망이 되기를 빌며. 우리 반 아이들이 자라서 사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슬픈 선택으로 아파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