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으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초겨울맛이 어떤지 미리 맛을 보여주려고 그러나. 낮에는 아직 덥고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니 이럴 때 감기조심, 건강조심을 해야겠다. 특히 우리 선생님들의 건강이 학생들의 배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선생님께서는 내 몸이 공적인 몸이기에 건강에 더욱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오늘도 독서의 계절이고 하니 독서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대부분이 독서 하면 머릿속에 제일 많이 떠올려지는 것이 송(宋)나라 구양수가 강조하는 삼다(三多)일 것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삼다(三多)에 대해 들어온 익숙한 말이다. 구양수는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를 강조한다. 많이 읽고(多讀) 많이 쓰고(多作) 많이 생각(多商量)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이(多)’가 어떨 때는 해로울 때가 있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많이 운동하고 하는 것은 몸에 해롭듯이 지나친 것은 득(得)보다 실(失)을 더 가져오게 된다. 그런 것을 빌미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누구든 삼다(三多)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자체가 너무나 힘이 들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많이(多)’인지가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양수의 삼다(三多)를 내세우는 이유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이(多)’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어디까지가 ‘많이(多)’이며, 과연 보통 사람으로서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많이(多)’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스스로 내리면 된다. 많이 읽으라고 몇 권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많이 쓰는 것도 몇 번 쓰는 것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니고 많이 생각하는 것도 양을 측정할 수가 없다.
단지 내가 좋은 글을 쓸 때까지, 내가 쓴 글에 대해 만족을 느낄 때까지, 내가 원하는 글을 시원스럽게 쓸 수 있을 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생각을 하는 것이 ‘많이(多)’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니 그 목표의 도달점은 평생이 되어야 한다. 삼다(三多)에는 구체적인 수량적 도달점이 없다. 끝이 없다.
책을 많이 읽어야 많은 글거리를 만나게 된다. 생각거리를 찾게 된다. 글을 쓸 수 있는 글감을 저축할 수 있게 된다. 통장에 저축하듯이 머리에 차곡차곡 저축해 놓으면 그 때부터 글쓰기의 밑천이 생기게 되고 사색의 자금이 마련되게 된다. 건축가가 아무리 좋은 집 짓고 싶어도 좋은 자재가 없으면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없듯이 글감이 빈약하거나 좋지 못하면 글다운 글을 쓸 수가 없다.
사람은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많은 것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력이 좋은 머리보다는 무딘 연필이 더 낫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책을 읽을 때마다 메모해야 한다. 자기 특유의 기법으로 메모해야 한다. 생각거리를 메모해야 한다. 비판거리를 메모해야 한다. 본받을 점을 메모해야 한다. 자기의 생각과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메모해야 한다.
이렇게 메모해서 기회가 되면 글로 옮기면 된다.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누가 뭐라 하든지 말든지 글을 써보는 것이 글쓰기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방법이 따로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써내려 가면 된다. 그리고는 다시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고 나의 것으로 다듬어 가면 된다.
그러니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져서도 안 된다. 더욱이 글을 쓰는데 대한 부담을 가져서도 안 되고 생각에 대한 부담을 가져서도 안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책 읽고 생각해 보고 메모해 보고 글을 써 보고 다듬어 보고 하면 된다. 여기에는 규칙이 필요 없다. 규칙이 많으면 삼다(三多)에 장애만 될 뿐이다.
독서의 계절!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계절에 책을 펼쳐 봄이 어떨지? 교실을 운동장화(運動場化) 하지 말고 도서실화(圖書室化) 하면 안 될까? 책을 눈앞에 두고 구경만 하지 말고 책을 펼쳐 보자. 책을 펼치면 중도에 그만 두지 말고 끝까지 읽어봄이 어떨지? 책을 읽고 무엇을 읽었는지 머리에 남는 것이 있도록 메모해 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