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점점 깊어가는 아침에 조선(朝鮮) 중종(中宗), 선조(宣祖)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인 이이(李珥)의 독서에 관한 말씀을 되새겨본다. 이이(李珥)는 “凡讀書(범독서)는 必熟讀一冊(필숙독일체)하여 盡曉義(진효의)하여 貫通無疑(관통무의)라야 然後(연후)에 乃改讀他書(내개독타서)라” 즉 “무릇(凡) 독서는 반드시 한 책을 익히 읽어(熟讀) 뜻을 다 깨달아(曉義) 꿰뚫어 의문이 없어진(貫通無疑) 뒤에야(然後) 이에(乃) 바꾸어(改) 다른 책을(他書) 읽어야(讀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이(李珥)는 한 책을 읽을 때 반드시 필히 한 책을 익히 읽으라고 함에 유의해야 한다. 반드시는 마땅히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고 있다. 한 책을 숙독해라고 한다. 익숙할 때까지 읽으라고 한다. 책을 읽을 때 쉬운 책을 한 번 읽어 익숙이 되고 뜻을 깨닫게 되어 의문이 생기지 않아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몇 번이고 읽어야 뜻이 깨달아지고 의문이 풀린다. 그러니 몇 번이고 반복해서 또 읽고 해야 한다. 그런데 책이 좀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만 책을 덮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경우 책을 덮고 다른 책으로 넘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책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또 읽으라고 이이(李珥)는 가르치고 있다.
배우는 자세는 이러해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 앞에서 나아가야 하고 책을 몇 번이고 읽어야 한다. 아니 깨달음이 오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읽어야 한다. 아니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백 번이라도 읽어야 한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 백 번 읽으면 글의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글의 뜻이 저절로 드러날 때까지 읽어야 한다.
여기의 백(百)도 일백 번이라는 뜻보다 무한정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깨달음과 이해가 한 번만에 되면 이때의 백(百)은 한 번이라는 뜻이 되고 깨달음과 이해가 열 번만에 되면 이때의 백(百)은 열 번이라는 뜻이 되고 깨달음과 이해가 백 번만에 되면 이때의 백(百)은 백 번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기에 책을 읽되 이해가 될 때까지, 깨우쳐 알게 될 때까지 읽어야 하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의 위략(魏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후한 말기에 동우(董遇)라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일을 하면서 책을 손에서 떼지 않고(手不釋卷) 부지런히 공부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郞)이란 벼슬에 올라 임금님의 글공부의 상대가 되었으나, 조조(曺操)의 의심을 받아 한직으로 쫓겨났다. 각처에서 동우의 학덕을 흠모하여 글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나에게 배우려 하기보다 집에서 그대 혼자 책을 몇 번이고 자꾸 읽어보게. 그러면 스스로 그 뜻을 알게 될 걸세." 하고 넌지시 거절하였다”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많다. 벼슬을 얻고 임금님의 글공부 대상이 되었다는 게 그저 된 것이 아니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을 손에서 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글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글공부는 사람에게 배우러 하지 말고 책 속에서 배우라는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혼자 책을 몇 번이고 자꾸 읽어보라」는 말을 가슴속에 담아 두어야 한다.
혼자, 스스로 하라는 말씀, 선생님에게서 직접 배우려고만 하는 것보다 스스로 배워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글공부가 된다는 말씀, 책을 몇 번이고 자꾸 읽어보라는 말씀을 되새겨보면 숙독(熟讀)의 의미도 새삼스럽게 느껴질 것이고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이라는 말도 이해가 될 것이고 공부도 스스로 해야 함도 깨닫게 될 것이다. 자학자습(自學自習)의 의미도 보다 따뜻하게 다가올 것이고 타율적 자율학습이 아닌 능동적 자율학습이 왜 좋은지도 이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