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00이 머리에서 피가 많이 나요!" 2교시 후 쉬는 시간,우리 반 아이들이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다목적실로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00이는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큰 사고가 난 듯하여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다 그랬니?" "00때문에 다쳤어요."
놀라서 우는 아이의 머리를 급하게 손으로 지혈시키면서 애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00이가요, 00이랑 장난을 치다가 칠판 밑으로 들어가다 박았어요."
지혈은 시켰지만 꿰매려면 얼른 가까운 병원에 가야 했습니다.지혈을 하고 찬찬히 살펴보니 꿰매지 않아도 괜찮을 상처였습니다. 다급하게 달려온 1학년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시키고 교실 바닥의 핏자국을 닦으면서 놀라고 당황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원어민 강사 선생님이 오시지 않아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시한폭탄입니다. 특히 남자 아이들의 장난은 천방지축 그 자체입니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의 영어 교육을 위해 원어민 영어 선생님을 오시게 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공부하는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원어민 강사가 수업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1,2학년이 함께 들어가니 자기들끼리 장난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변명과 거짓말에 익숙한 아이들, 누구 탓일까?
그런데 아이가 다친 일보다 더 마음 상한 것은 다른 아이들의 태도였습니다. 같이 장난을 친 아이는 자기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면서 생떼를 썼습니다. 친구들이 그 상황을 이미 다 보았고 다친 아이도 함께 놀다가 그랬다고 이야기를 하여도 자신의 잘못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실에 데리고 와서 그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단짝친구이면서도 친구의 아픔에는 얼굴 색을 바꿔 버리는 모습에 화가 나서 수업 시간도 뒤로 미룬 채 우리 반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다친 아이가 장난을 먼저 걸어서 쫓았는데 도망가면서 저 혼자 칠판 밑으로 들어가서 다친 것이니, 자기 잘못은 없다는 아이의 논리였습니다. 함께 본 아이들도 뒤쫓은 아이가 다른 친구들보다 힘도 세고 말발이 센 아이라서 그런지 쉽게 증언(?)에 나서질 않는 것 같아 더욱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친구가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데도 같이 걱정해주거나 위로하는 아이보다는 깔깔대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 아픔을 먼 산 불 구경 하듯 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들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아 너무 슬프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조목조목 따지며 훈계를 했습니다.
먼저 약속 시간에 와서 수업을 진행하지 않은 원어민 강사도 잘못이고 그 강사님이 안 계신 것도 모르고 아이들끼리만 놓아둔 내 잘못도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응급처치를 끝낸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먼저 장난을 걸어서 친구를 약 올리니 쫓아가게 만든 잘못, 그 다음은 쫓은 아이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친구가 장난을 좀 치더라도 교실에서 뛰며 구석으로 달리게 만들었으니 하마터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하였으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아파하는데 구경만 하면서 웃기까지 한 아이들에게는 더 큰 꾸지람을 했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친구 모습에 같이 힘들어하며 위로를 나눌 따스한 마음, 배려하는 마음, 공감 능력이 없다는 것은 차가운 이성만 존재하는 살벌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며 어떤 사람은 평생 머리로만 살다가 가슴에 이르는 길마저도 찾지 못한 채 차가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가장 순수하고 착해야 할 아홉 살 아이들이 정직보다는 변명을, 사랑과 이해보다는 무시와 무관심의 싹을 키우는 것은 되돌아 보아야 할 문제가 분명했습니다.
좋은 책을 아침마다 읽게 하고 짝끼리 모둠학습을 시키고 같이 밥을 먹고 간식을 나누어 먹게 하며 친구 간의 우정과 배려를 배우게 하였지만 극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의 본능만을 보여주는 모습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친구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지는 못할망정, 친절한 말조차 건넬 줄 모르는 마음가짐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대한민국을 이루고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최근의 국가적인 비극을 바라보는 극단적 시각 차를 생각하면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도 어른들의 그것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한 인간의 비극적 선택 앞에서 악어의 눈물은 커녕 몇 번이고 다시 끄집어내어 죽이기를 서슴치 않는 어른들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죽음을 미화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었다면 진솔하게 사과하고 화해와 용서로 더 큰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지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는 요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싸움질을 보며 메말라가는 아이들
지금, 우리들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자라던 때보다 많이 배우고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며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삽니다.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도 없고 밥이 없어 점심을 굶는 아이도 없습니다. 학원비가 없어도 학교에서 방과후학교 수업으로 여러 가지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 넘쳐나는 교실에서 아침독서로 하루를 엽니다. 방과후학교 수업으로 4시까지 학교 생활을 하므로 힘들까 봐 청소조차 날마다 담임인 내가 다하며 친절과 배려를 몸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건만 내 정성이 부족했나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마음 속에 친절이 자리잡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니 근본적인 원인을 탐색해야 했습니다. 외동 아이로 자라는 아이들, 가정의 붕괴로 사랑을 받지 못한 마음에 생긴 상처와 울분, 감성을 계발하는 전인교육보다는 학력 평가 위주의 양적인 평가에 치우친 교육 현실, 경쟁과 수월성 중심의 교육 방침 등, 많은 요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공교육
사교육 없는 학교 지원 방안이나, 3단계 학교 자율화 방안, 미래형 교육과정 등도 따지고 들어가 보면 학력 만능과 경쟁지상주의를 부추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런 점에서 지난 달에 발표된 서울대 조사 결과는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서울대 교수 158명은 서울대 학생들의 부족한 자질로 공동체의식, 배려심, 창의성, 대인관계 능력을 꼽았습니다. 이러한 품성은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으로는 기르기 힘든 덕목입니다.
2008년 6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래학자 토플러는 "모두 같은 나이에 학교에 들어가 비슷한 것을 반복적으로 배우는 것은 공장을 연상시킨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미래에 같은 공장에서 일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교육의 다양성이 확대되어야 한다."며 우리나라 학교 교육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해외 석학들의 우리 교육에 대한 우려 섞인 충고를 대변하듯, 2009년 미국대학 수시 분석 결과는 더욱 참담했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 합격은 '바늘구멍'통과하기였기 때문입니다. 우수한 성적(SAT), 뛰어난 내신 성적과 과외 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낙방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개성의 상실'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원자만의 독특한 리더십이나 창의적인 학습 활동이 없이 점수와 경쟁으로 수월성만을 중시한 나머지, 학생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기르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상상력은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한 아인시타인의 말은 부모님과 선생님이 꼭 새겨 들어야 할 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리더십은 '소통 능력'
상상력이나 창의성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미래의 리더십으로 주목 받고 있는 소통 능력이 탁월한 따스한 감성을 지닌 친절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 부단히 가위질을 했습니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번질 뻔한 아이들의 장난과 실수 앞에 서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하는 악수를 시키며 어른들의 세상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모습을 미리 그려보며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가위질을 했습니다.
상처 받은 친구가 이해될 때 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입장을 들으며 마음으로부터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업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어쩌면 국어 받아쓰기 만점을 받는 것보다, 수학박사가 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마음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은 엄하게 꾸짖으면서도 돌아서서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부모와 선생님, 어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돌팔매가 무서워 아이들 눈치를 보며 포기하는 일은 인성 교육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끝까지 자기 잘못은 없다던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하고 괜찮다며 친구를 안아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던 아이들도 행복해 했습니다. 친구가 아플 때 웃어버린 아이들도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슬픔은 쌓이면 분노로 변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받은 상처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울분과 상처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가난한 아이들, 조손가정의 아이들,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많아 다른 친구들의 아픔을 이해해주려는 따스함이 부족합니다. 아이들의 상처와 울분이 원한이 되지 않도록 다독이는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은 이성보다는 가슴으로 할 일입니다. 친절한 마음으로 상대의 상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낮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밑그림이 완성되는 정직성과 도덕성 아홉 살 아이들은 정직성과 도덕성의 발달단계에서 매우 소중한 시기입니다. 신체적인 발육에 못지 않게 정신적 성장 단계에서 확고한 정직성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이 시기를 적당히 지내면 아이들은 거짓말 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거나 습관처럼 하기도 하고 변명을 밥 먹듯 합니다. 심한 경우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도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친구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도 잘못을 느끼기 전에 빠져 나갈 궁리에 바빠서 거짓말과 변명으로 나를 힘들게 한 아이는 앞으로도 내내 지켜보며 훌륭한 나무가 될 수 있도록 가위질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가지가 잘려 나가는 순간의 아픔에 연민과 동정으로 망설이는 동안 웃자라서 전정의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함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다 다르듯, 그들이 지닌 개성과 능력도 다 다릅니다. 가르치는 교과목은 다 같지만 그 아이들의 마음 밭에 심어지는 교육의 씨앗은 그들의 품성과 인성의 깊이에 따라 다른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고 친절하기를, 자신의 잘못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를, 그리하여 해가 갈수록 지식의 깊이는 더하고 마음의 넓이는 더 넓은 우람한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을 날마다 거닐며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기를 빌며 오늘의 일기를 끝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