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헌문편에 이런 글이 나온다. “古之學者爲己(고지학자위기)러니 今之學者爲人(금지학자위인)이로다”. 이 말은 ‘옛날 배우는 사람은 자기를 위하였는데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다.’는 뜻이다.
古之學者(고지학자) 즉 옛날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다. 옛날의 배움에 임한 사람들, 소위 학자(學者)들은 몸을 위하여 배웠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수양을 위해서 배운 것이다. 배움의 목적을 자기의 수양에 둔 것이었다. 자기의 사람됨이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古之學者爲己(고지학자위기)를 줄여서 爲己之學(위기지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 자신의 수양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성에 초점을 두고 공부에 임한 것이었다. 남을 위해, 나라를 위해, 세계를 위해 공부를 해야지 하는 마음이 없었다.
今之學者(금지학자) 즉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 배웠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공부하였다. 자신의 유익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국가에, 세계에 유익을 주기 위해 배웠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자기 수양에 대한 것은 뒷전이었다.
古之學者爲己(고지학자위기)와 今之學者爲人(금지학자위인)의 말씀은 공자께서 옛날의 학자는 칭찬하고 오늘의 학자는 지적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古之學者爲己(고지학자위기)와 今之學者爲人(금지학자위인)의 문장을 분석해 보면 대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문에서는 대구의 형식은 문장성분도 일치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해석도 같은 식으로 되어야 한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 배웠고 오늘의 학자는 남을 위해 배웠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해, 자기 수양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의 학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배웠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장구조에 맞은 해석이라기보다 주변상황을 고려하여 확대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다. 爲人(위인)의 人을 문장자체에서 보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 출세나 자기 유익을 위해’라고 해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앞부분 爲己(위기)를 ‘자기를 위해’라고 해석한다면 뒷부분 爲人(위인)은 ‘남을 위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공자께서 문장의 앞부분에서는 옛날의 학자들이 자기 수양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칭찬하면서도 현대와 같이 남의 유익을 위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아쉬워서 하신 말씀이고, 문장의 뒷부분에서는 오늘의 학자들이 남의 유익을 위해서 배우는 것은 좋은데 자기의 수양 즉 인성면에 소홀히 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문장은 옛날에 배우는 이들이나 오늘날에 배우는 이들을 모두 칭찬과 지적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옛날의 학자의 인성과 오늘의 학자인 실력이 함께 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해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남에게 유익을 주고 나라에, 세계의 유익을 위해 학문한다는 것이 정말 값진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수양, 즉 자기 사람됨에 대한 관심이 없으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됨을 공자께서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배움에 임하고 있는 10대 청소년들은 옛날의 학자처럼 우선 자기의 수양, 즉 사람됨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고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학자처럼 남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실력을 쌓아가야 하겠다.
今之學者爲人(금지학자위인)을 줄여 爲人之學(위인지학)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배우는 이들은 爲己之學(위기지학)과 爲人之學(위인지학)이 함께 가야 할 것이고 爲己之學(위기지학)과 爲人之學(위인지학) 어느 것 하나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이 모두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