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제 선생님 특강을 들었던 학부모입니다. 선생님께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깐 짬을 내실 수 있는지요?”
“아, 그러세요. 예, 지금 시간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어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내용인데요. 저희 아이가 지금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참으로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입니다. 이제 내년이면 대학에 진학해야할텐데 과연 어떻게 진로를 잡아야할 지 고민입니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듯 했다. 그 사연은 아마도 아이의 진로와 관련이 있을 터이고, 그래서 어제 들었던 내 강연의 내용과 맛닿아 있는 듯 했다.
최근 대학입시의 큰 흐름이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에 있고 이에 따라 학교와 가정에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간파한 도교육청 학력관리팀이 찾아가는 권역별 대학입시설명회를 마련하였고 입학사정관제와 관련된 내용은 내가 강연을 맡게 되었다.
장소는 청양예술문화회관이었고, 한 낮의 기온이 30°를 웃도는 가마솥같은 날씨에도 1,000여석 가까운 관람석은 교사와 학부모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미 도교육청에서 일선학교를 대상으로 입학사정관제와 관련된 설명회가 열린다고 홍보를 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무더운 날씨와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면 이 정도로 많은 분들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맡은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이해와 대응 전략’을 발표하는 순서가 되었다. 정해진 시간을 30분 정도 초과했는데도 관람석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강연의 내용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지방의 특성상 입시 정보에 그만큼 많은 갈증을 갖고 있었다는 반증인 듯 했다.
얼마전 대통령께서 일선 교육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본인의 임기말(2012년)까지는 100%에 가까운 대학이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어서 교사나 학부모들의 관심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강연 내용과 관련해서 도교육청에서 미리 책자를 제작하여 참가한 분들에게 배포했는데도, 내가 준비한 프리젠테에션 자료의 내용을 꼼꼼히 적는 학부모님도 계셨다.
내 강연의 요점은 이러했다. 입학사정관제가 주입식 교육으로 공부 선수를 만드는 현재의 교육시스템에서 잠재력과 소질 그리고 창의적인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제도인 만큼, 그 준비 과정은 어디까지나 선생님과 학부모님의 이해와 협조를 필요로 한다. 즉 입학사정관제는 지금까지 성적으로만 아이를 평가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아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또 어떤 소질을 갖고 있는지를 발견하여 이를 적극 격려하고 이끌어줘야 할 책임이 선생님과 학부모에게 있다는 얘기다.
“입학사정관제는 사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습니다. 즉 아이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가 있어야 하고 또 아이가 참여하는 활동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겨줘야 합니다.”
참여하신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입학사정관제 전형의 핵심 자료인 학교생활기록부의 충실한 기록이 제자들의 당락을 좌우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사실 같은 교사로서 수업은 물론이고 학생 상담, 생활지도, 각종 공문에 대한 응신 등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선생님들의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교육이 그동안 점수 위주의 치열한 경쟁만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이제는 입학사정관제를 통하여 아이들의 숨어있는 소질과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붇돋워줘야 할 시점이기에 선생님의 역할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선생님, 어제 말씀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저희 딸아이는 중학교 때부터 역사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꿈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선지 다른 과목보다 국어 관련 과목의 성적은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길을 부모로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이가 사범대학에 진학해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데 본인은 작가가 되기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가겠다고 합니다. 현재 점수로 보면 서울 시내의 상위권 대학에 욕심을 내볼 수도 있고, 또 학교 선생님들도 그렇게 권유하고 있는데 본인이 희망하는 학과는 서울 시내에 있지만 중위권 정도의 대학에만 있습니다.”
아이들의 진로지도를 하면서 흔히 겪었던 내용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즉 아이가 장차 하고 싶은 일과 부모 그리고 학교 선생님의 생각이 각기 다른 경우였다.
“어제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아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는 것이 좋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내 생각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자식의 장래를 염려하는 부모님의 절박한 처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신중하게 말씀드렸다.
“네, 어머니 말씀의 취지는 공감이 갑니다. 아이가 원하는 소설가의 길이 불투명하고 또 대중소설도 아닌 역사소설인데 장차 이 길로 가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가 장차 하고 싶은 분야가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삶의 행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이의 뜻을 존중해주는 것이 좋겠고 이런 경우가 바로 입학사정관제 전형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선생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분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는 것이 좋겠군요. 사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간판이나 직업을 갖는 것도 좋겠지만 사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어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3교시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지금 하고 있는 수업은 도구과목을 중심으로 한 여름방학 보충수업이다. 아이들이 수능에서 1점이라도 더 딸 수 있도록 교사 중심의 강의식 수업이다. 순간, 교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이 무더운 여름에도 학교에 나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등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와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분명한 것은 이 수업이 아이들의 소질과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