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금기시했던 고교별 수능 성적이 공개됐다. 영역별 최상위권을 차지한 학교를 살펴보면 특목고 일색이다. 그 중에서도 외고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영역별 평균점수 상위 10개교 가운데 외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언어영역, 수리영역, 외국어 영역에서 각각 7개교로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외국어 영역에서 1위는 외고가 아닌 자립형사립고가 차지했고, 수리영역 1위는 외고가 차지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지역을 불문하고 외고 진학은 곧 명문대 진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지 오래다. 중학교마다 외고 진학을 위해 사활을 걸고 있고, 사교육에서는 외고 진학이 곧 학원의 생존으로까지 인식하고 있다. 학부모들 또한 자녀의 외고 진학을 위해서라면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감수하겠다는 분위기다. 외고 진학자가 있는 중학교와 학원은 곳곳에 현수막을 내걸고 마치 고시 합격자라도 배출한 듯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선다.
외고 진학을 명문대 진학의 약속어음으로 여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중학생뿐만 아니라 초등학생까지 입시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교내에서 최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외고 진학은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초등학생 때부터 선행학습이 유행하고 있다. 외고 열풍 탓인지는 몰라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은 입시학원에 다니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학교 수업이 끝날 때쯤 교문 앞에는 학생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학원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정치권에서도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외고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나 대입 창구로 변질되면서 사교육의 주범이 되고 있다고 성토한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외고를 자율형사립고로 전환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추진하여 우수 학생을 싹쓸이하는 식의 입시 관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고 공언했고 이주호 교과부 차관도 동감을 표시하며 보조를 맞췄다.
외고가 자율형사립고로 전환되면 내신 50% 이내의 학생들은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고 최종 선발 또한 추첨으로 결정된다. 이렇게되면 외고 입시 열풍은 수그러들겠지만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외국어 관련 전문 인력을 양성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외국어에 관심있는 학생들이 외고에 진학하여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쌓도록 지원하는 것은 교육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필요하다.
문제는 외고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린데 있다. 82단위 이상을 설립 취지에 맞는 전문교과로 편성해야 함에도 국영수 위주로 편성해 입시 학원 기능을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외국어와 관련된 수월성 교육이라는 본연의 취지를 망각한 채 명문대 진학에만 열을 올리다보니 사교육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셈이다. 외고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 현황을 살펴보면 2009년 기준, 어문계열 진학자는 25%에 불과하고 인문계열중 비어문계열 진학자가 60.1%를 차지했고, 심지어는 이공계열과 의학계열에 진학한 학생이 10%를 넘었다. 같은 특목고 가운데 과학고는96.7%가 이공 및 의학계열에 진학했고, 어문계열은 한 명도 없고 비어문계열은 0.2%에 불과했다.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자립형사립고는 논외로 치더라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특목고의 설립취지에서 적어도 외고만큼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간판은 외고로 남겨둔 채 자율형사립고로 전환하는 것도 바람직한 해결책은 아니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외고 본래의 설립 취지에 맞게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고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대입에서 어문계열로 한정하면 그만이다.
사회과학대나 경영대에 지원할 학생은 일반고를 선택하고 어문계열에 진학할 학생만 외고에 진학하면 된다. 외고에 진학해서도 비어문계열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외국 대학으로 진로를 정하면 된다. 외고가 중고교 단계에서 조기 유학을 떠날 우수 인재를 흡수한다는 긍정적 요인을 감안한 것이다. 외고 입시를 단순히 부작용만 보고 몰아세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공산이 크다. 정치권이 할 일은 외고 본래의 목적과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