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공적 기록은 개인의 사적 삶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반면 소설은 역사가 누락한 인간적 진실을 추적하고, 개인이 남기지 못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소설 ‘덕혜옹주’(권비영 作)는 역사 속에 잊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한다. 소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었던 여인의 삶 하나하나를 밀착하여 차분하게 따라간다.
조국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국왕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비극의 20세기. 그 가운데 주인공 ‘덕혜’가 있었다. 덕혜는 황녀로 태어났지만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고, 다시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명목상 유학이었지, 볼모나 다름없었다. 일본에서도 그녀는 황족이기 때문에 더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했다.
“1909년은 그런 시대였다. 힘을 가진 자가 득세하는 세상. 권력의 그늘은 생각보다 안온했고, 일본에 빌붙은 개화파들은 왕실조차 흔들었다. 고종은 한갓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p. 17)
그녀는 어린 나이에 강제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났다. 식민지 황녀의 딸로 침략국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서 박대와 차별 속에서 우울한 성장기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꿈을 잃지 않았다. ‘조선에서 선생님이 되어, 조선의 백성을 가르치고 키워서 훌륭한 사람을 만들고 싶어 했다.’(p. 154) 한 순간도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나는 돌아가리라. 어머니 계신 곳으로 돌아가리라.’(p. 160)를 마음 속에 담고 살았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한낱 개인의 소망도 펼치지 못하게 굴러갔다. 여인 ‘덕혜’는 사랑도 모르는 채 강제 결혼을 하고, 긴 암흑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결국 부부의 연을 맺은 다케유키와 함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강제로 간 유학, 원하지 않는 결혼. 그녀의 삶 속에서 20세기는 조국의 운명과 함께 그렇게 저물어간다. 그녀의 생애는 한국 근대화 시점과 일제강점기가 맞물리는 정점에 있었다는 점에서 비극으로 읽힌다. 그녀는 가고픈 곳도 가지 못하고, 불러주는 이도 없는 삶의 공백에 스스로 갇혀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스러진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얇은 껍데기 아래 잠복해 있는 그녀의 비정한 현실. 이제 그리움이 고사(枯死)되어 실핏줄 속의 온기로만 남아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느낀다.
작가는 역사와 소설적 상상력을 맞붙여놓음으로써 그녀의 운명을 뜨겁게 포착했다. 황녀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좌절당한 한국의 근대사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녀가 평생 꿈꾸어온 것이 무엇이었던가? 부모의 나라에서 조선인과 혼례를 하고, 백성에게 사랑을 나눠주자는 것이 전부였다. 조선에서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싶어 했던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다.’(p. 403)는 덕혜의 삶은 한 여인이 살았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의 아픔이다.
가녀린 몸으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힘이 부쳤다. 사랑과 증오, 선망과 원한 등 모든 일상은 작은 몸으로 치환된다. 고통과 불안이 어느덧 그녀의 정신으로 전이된 것이다. 그녀의 몸은 거친 들판에 핀 가녀린 꽃처럼 힘이 없다. 결국 그녀는 혼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정신을 온전하게 가눌 힘이 없었고, 스스로의 내면에 무릎을 꿇었다.
소설 ‘덕혜옹주’는 읽다보면 곳곳에서 그녀의 아픔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조선은 이제 없어! 망해서 없어진 나라라고! 대일본 제국의 식민지란 말이야!”
“나는 이제부터 어머니와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정신병자예요!”
이 말은 덕혜의 딸 정혜(일본 이름 마사에)가 내뱉은 것이다. 강제로 결혼했지만, 불행한 만남이었지만, 피붙이 정혜만은 가슴 벅차오르는 생명이었다. 덕혜는 아이를 보면서 차차 좋아질 것이라고 최면까지 걸었다. 하지만 덕혜는 딸에게도 버림을 받는다. 급기야 덕혜는 자신의 딸을 향해 ‘저것이 내 굴욕의 징표’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따뜻하고 웅숭깊은 시선으로 한 여인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황녀의 화려함이 아니라, 한 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그것대로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끝없이 우울의 세계로 침잠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삶에서 우리는 그 삶을 기억하기 위해 다시 우울을 앓고 있다. 작가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조를, 혹은 내면의 어두운 세계를 소설의 언어로 인화하듯 찍어내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줄기는 물론 덕혜옹주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덕혜옹주는 단지 운명에 체념하는 우울한 여인이 아니다.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칼날이 번뜩일 때는 고개를 숙이며, 그 안에서도 분기탱천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지치지 않고 탈출을 꿈꿨고, 좌절의 순간에 매번 기적을 바랐으며, 그러면서도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던 여인이다.”(한국아이닷컴 윤태구 기자)
당시 식민지 현실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란 어쩌면 죽을 만큼 힘겨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과 내면이 이미 황폐해져버린 주인공. 덕혜는 황녀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평생의 삶은 쓸쓸함 그 자체다. ‘그 삶이 너무 아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던 것’처럼 소설을 읽으면 어느 새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그 눈물은 차가운 눈물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향한 뜨거움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 눈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극단의 모습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우리 곁으로 끌어오고 있다. 한국근대사의 시점인 20세기 초에 조선의 궁에서 일본까지 광대한 여정을 따라가는 한편 황녀와 그의 주변 인간 군상을 선보이고 있다. 역사의 격류에 휩쓸린 한 여인의 운명을 잔잔한 문체를 유지하면서 현재에 되살려 놓았다는 점에서 독자의 사랑이 많아지고 있다. 부피 있는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접목시켰으면서도 인간적 고뇌를 놓치지 않은 섬세함이 독자에게 호감을 준 것이다.
소설 ‘덕혜옹주’는 예상보다 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로써 덕혜옹주의 슬픈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만들면서 불행했던 황녀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아울러 어느 틈엔가 한국 문단에 주류의 대열에 합류한 작가의 앞으로 행보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