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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꿈·사랑·멋’을 가르쳐주신 조병화 선생님

5월이면 생각나는 선생님이 있다. 조병화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큰 나무처럼 서 계시지만, 5월이면 더욱 그리움에 사무쳐온다. 조병화 선생님은 학창 시절에 꿈·사랑·멋을 가르쳐주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저 문학이 좋았다. 문학은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문학을 통해 보는 세계는 내가 꿈꾸고 있는 행복의 무지개가 보였다. 문학과 함께라면 내 삶의 호숫가에도 아름다운 꽃이 필 듯했다.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대학도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은 내가 꿈꾸던 낭만이 없었다.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는 민주화의 열망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대학도 혼란스러웠다. 학우들은 매일 전투경찰과 투석전으로 마주쳤다. 그 혼란을 뒤로 한 채 나는 군에 쫓기듯 갔다. 제대 후에도 캠퍼스는 최루탄 냄새만 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의 불안은 여전했다. 그 속에 있는 나는 더욱 고독했고 답답했다.

그때 답답함에 못 이겨 강의실에서 조병화 선생님께 함부로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랑 타령의 시는 저급 문학이라고 거칠게 말했다. 시대정신을 담은 시가 읽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대답 대신 일제강점기 때 경성사범학교와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시절을 말씀해 주셨다. 일본인들과 경쟁하며 꿈을 키우던 말씀을 해 주셨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꿈을 버릴 수 없었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평상 시 뵐 수 없는 비장함이 보였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씀이었다.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 경기에서도 질 수가 없어서 한발 더 뛰었다는 기억을 회고하셨다.



선생님의 수업은 늘 이렇게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씨앗을 뿌리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마음에 꿈을 심어주셨다. 우리가 시인이 되겠다며 덤벙대며 요란스럽게 떠들 때도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꾸짖은 적이 없으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현학적인 지식보다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셨다.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기존 지식의 지평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주셨다. 자신감을 북돋아 주시며 우리의 기를 살려주려고 노력하셨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부총장이라는 높은 보직을 담당하고 계셨다. 대외적으로도 선생님은 한국 시단(詩壇)에 거목 같은 분이었다. 선생님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분이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선생님은 당시 텔레비전 커피 광고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처럼 직접 커피를 주시곤 했다. 아주 하찮은 학생이 가도 허투루 대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연말에 웃어른께 인사로 드리는 연하장에도 당신의 그림이 담긴 엽서에 따뜻한 글로 답해 주셨다. 인사차 찾아가면 황송하게도 선생님의 신간 시집을 주셨다. 직접 헌사를 써 주시고, 시인이 되라고 격려를 해 주셨다. 손님이 찾아와서 말씀 중이셔도 내치지 않으시고 야무진 제자(?)라고 소개해 주신 기억이 난다.

대학 졸업 후에도 선생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셨다. 내가 직장 생활에 얽매여 있어 직접 찾아뵙지 못하고 편지를 드렸는데도 답장과 함께 선생님의 시집을 보내주셨다. 이제는 ‘윤 선생’하면서 나에 대한 호칭도 높여주면서 푸짐하게 마음을 주셨다. 세월이 흐르면 그 마음도 닳을 듯했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연로하시고 병상에 계시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자를 사랑하신 그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을 기억할 때 여럿이 있지만, 멋이란 말을 안 떠올릴 수가 없다. 선생님을 찾아 가면 연구실에서 한가롭게 앉아 계신 것을 못 보았다. 책상에서 업무를 보시고, 한쪽 탁자에는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은 그림도 그리셨다. 연구실에서 선생님은 멀리 떠 있는 구름을 화폭에서 끌어다가 채색을 하고 계셨다. 선생님의 그림은 역설적이게도 여백이 아름다웠다. 어디 그뿐인가. 글씨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큰 붓으로 힘차게 글씨를 쓰신다.

하도 일을 많이 하시기에 내 딴엔 걱정을 해 드린다고 일을 줄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께서 ‘일은 내 삶에 성실함을 보이기 위한 것이고, 또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멋있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붓으로 ‘꿈·사랑·멋’을 써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교직에서 담임을 하면서 급훈을 정할 때 고민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꿈·사랑·멋’을 권했다. 선생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도 금방 조병화 선생님의 모습을 뵈는 것처럼 따랐다.

나는 제법 경력이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제자 사랑을 흉내 내고 있다. 돌이켜보니 오늘날까지 내가 큰 과오 없이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도 결국은 교실에서 선생님 흉내를 내며 아이들 앞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지식보다는 삶을 크게 보는 꿈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선생님이 바쁜 가운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노력을 보이신 것처럼, 나도 글을 쓰는 일에 노력을 보이고 있다. 내 삶에 충실하고 풍요로운 인생을 가꾸는 노력을 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가 자신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한 것처럼,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선생님의 사랑이다. 선생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내가 세상에서 올곧게 살아가고 있다. ‘아! 오늘 선생님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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