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생각을 한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은 잠들기 전에도 멈추지 않는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떻게 맞을까 고민한다. 내 생각은 물론 ‘지금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라면서 남의 생각까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실 사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아니 생각을 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생각을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훌륭한 특질이고 위대한 영역이다.
그런데 이 생각이 ‘병’이라고 한다. 코이케 류노스케은 ‘생각 버리기 연습(유윤한 옮김)’에서 잡다한 생각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다. 현대인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병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기본 번뇌가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눈, 귀, 코, 혀와 같은 신체의 일부분이나 의식을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있다. 이런 정보와 자극에 반응하는 마음의 충동에너지 중에 가장 큰 세 가지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p. 19). 탐욕은 어떤 것에 대해 좀 더 좀 더 하고 갈망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다’라고 반발하는 마음의 충동 에너지는 분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불쾌해지면, ‘이런 말은 듣기 싫다’라고 불쾌한 대상을 밀어내고 배제시키려는 것은 분노이다. 이 세 가지 번뇌가 생각을 많이 하게 하여 뇌를 분주하게 만든다. 그러나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고병, 즉 ‘생각병’이다.
이렇게 잡다한 생각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그 다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몸과 마음을 어떻게 조종하는 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과정을 우리가 말하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버리는 것, 접촉하는 것, 기르는 것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바라봐야 하는지, 불교의 계율을 통해 배울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말하는 것’에서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용되었던 탐욕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 에너지를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다고 충고한다.
‘익명 게시판’ 이야기는 최근 우리의 정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자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쓰기와 읽기다. 메일이나 블로그에 우리는 매일 같이 많은 글들을 쓰고 있으며, 또 타인의 그것들에서 많은 것을 읽는다. 이러한 쓰기와 읽기를 저자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구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욕구가 고통을 부르고, 번뇌는 구하면 구할수록 커진다고 말한다.
맞는 이야기다. 현대인은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블로그에 새로 올린 글을 몇 명이나 읽었는지, 어떤 칭찬의 댓글이 달렸는지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블로그에 방문자가 없거나 댓글 수가 줄면 부정적인 자극을 받는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 시간 낭비다. 자아의 괴로움을 키우는 꼴이다. 대신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일기가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글은 자기 자신을 바로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진정한 자아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한다.
‘글을 쓰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꼭지도 공감이 간다. 글을 쓰면서 주의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우선 글을 쓰고 돈을 받기는 하냐는 것이다. 지인들은 나이 먹어서 눈까지 안 보이는데 필요 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안쓰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다. 내 생활에 충실하기 위한 방편이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내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것이다. 글을 쓰면 돈보다 값진 나를 만난다. 나를 순화된 감정으로 채우고, 마침내 정화된 나를 만난다.
‘집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버리기 훈련’도 마음에 여울진다. 이제까지 소유물이 많아지면 마음도 더 편해지리라 믿었던 게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사실은 소유물을 줄이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쉬어진다는 것을 안다.(p. 164)
이 책의 부제를 보면 ‘생각하지 않고 오감으로 느끼면 어지러운 마음이 서서히 사라진다’고 했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 생각은 나중에 하고 먼저 오감을 느끼라는 것이다. 오감이란 눈, 코, 귀, 혀, 몸을 말하며 외부의 자극을 인식하는 통로이다. 이러한 오감에 의(意)를 더해 ‘육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통해 인식하는 것은 나(我)의 정체, 즉 ‘이것이 나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각에 있어 ‘들린다’와 ‘듣는다’의 차이는 수동적 상태와 능동적 상태와 연결된다. 수동적 상태가 실념(失念 : 정념을 잃음)이라고 한다면 능동적 사태는 생각이 집중되어 있다. 능동적 상태에서 우리는 생각의 잡음에 방해 받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비 오는 소리나 물 떨어지는 소리에 대한 감수성을 계발할 수 있다.
‘들린다’를 ‘듣는다’로 바꾸듯, 자신의 감각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의 잡음에 방해받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정보를 확실히 인지해 충족감이 느껴진다.(p. 32) 실제로 우리는 반복되는 생활 습관에서 무료함을 느끼고 짜증낸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면 짜증이나 불안이 사라질 수 있다.
이 책은 스님의 수행록이다. ‘생각병(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유발하기보다는 마음을 통제하여 중용의 도를 견지하며 평상심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머리가 맑아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생각 버리기다. 생각 버리기는 어쩌면 아주 간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버리기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기대가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능력을 향상시키는 힘이 있다. 생각 버리기도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생각이 마음속을 채우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늘 지켜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끊임없이 버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궁극적으로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채우는 길이다.